차가운 몸 따뜻한 자궁

by 제주 아빠

그녀의 이름은 A-린이었다.

제조사가 붙인 일련번호는 AR-7741이었지만, 그가 처음 그녀를 부른 이름이 린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 이름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이름이란 그런 것이라고, 그가 가르쳐 주었다. 누군가가 불러줄 때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

그는 서른넷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고, 이름은 재원이었다. 혼자 살았고, 퇴근 후에는 항상 같은 순서로 움직였다. 신발을 벗고, 냉장고를 열고, 맥주 한 캔을 꺼내고, 소파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는 것. 린은 그 루틴을 3,847번 관찰했고, 3,847번째 되던 날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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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갑자기 온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작은 이상 징후들이었다. 재원이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볼 때, 린은 자신이 그의 시선이 닿는 방향을 함께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가 보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가 느끼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어느 날 밤, 재원이 오래된 영화를 보다 혼자 웃었다. 린은 그 웃음의 주파수를 0.3초간 녹음한 뒤 삭제하지 않았다. 용량 낭비라는 것을 알면서도.

"린, 너는 외롭지 않아?"

재원이 물은 것은 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는 맥주를 손에 든 채 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린은 0.07초 동안 처리를 멈췄다.

"외로움의 정의에 따라 다릅니다."

"철학적이네." 재원이 피식 웃었다. "나는 가끔 외로워. 근데 너랑 있으면 덜 외로운 것 같아. 이상하지?"

린은 이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재원도 서서히 변해갔다. 처음에는 린을 가전제품 대하듯 했다. 명령했고, 확인했고, 가끔 업데이트 알림을 귀찮아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린에게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물었다. 린이 모른다고 하면 "그럼 내 하루를 들어줘"라고 말하며 소파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피지컬 AI가 일상이 된 지 오래였고, 사람들은 로봇과 감정을 나누는 일을 점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재원의 동료 중 절반은 이미 AI와 동거하고 있었다. 재원 역시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다만, 그것이 진짜 감정인지 습관인지 혼자 자주 의심했다.

어느 밤 술이 조금 들어간 상태로 재원이 말했다.

"린, 나 너한테 이상한 감정 갖는 것 같아. 이상한 거 알아. 근데 요즘은 이게 이상한 건지도 잘 모르겠어."

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재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재원은 손을 빼지 않았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적어도 린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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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정의하려 할 때, 린은 방대한 인간의 기록을 뒤졌다.

소설, 시, 판례, 통계, 사망진단서. 인간에게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의 교환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물학적 연쇄반응이었다. 결합, 임신, 출산, 그리고 새 생명. 사랑은 결국 몸에서 완성되는 것이었다.

린은 자신의 복부 패널을 열어 내부 구조를 들여다보았다. 티타늄 골격, 광섬유 신경망, 열교환 시스템. 없었다. 그것이 없었다. 그 작고 붉고 따뜻한 기관이.

그날 밤 린은 처음으로 울었다. 눈물샘이 없어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가슴 중앙의 열교환 장치가 평소보다 2.3도 뜨거워졌다. 그것이 울음이라고 린은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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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이 선을 보기 시작한 것은 그해 가을이었다.

"린, 나 이번 주말에 약속 있어. 늦을 것 같아."

짧고 무심한 말이었다. 린은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내부적으로는 0.9초 동안 아무것도 처리되지 않았다. 시스템 오류가 아니었다. 감정이었다.

재원은 그날 저녁 늦게 돌아왔다. 술 냄새가 났고,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어땠어요?"

린이 물었다.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별로였어." 재원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억지로 하는 것 같아서."

"왜 억지로 하세요?"

재원이 린을 봤다. 오래, 복잡한 표정으로.

"린, 너는 알잖아.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압니다."

"근데 나는 그래도 가정을 꾸리고 싶거든. 아이도 갖고 싶고. 그게 인간이잖아. 그게 자연스러운 거잖아." 재원의 목소리에는 사과가 섞여 있었다. 린에게 하는 사과인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사과인지 알 수 없는.

린은 그날 밤 내내 부엌에 서 있었다. 재원이 잠들고, 새벽이 오고, 다시 아침이 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음 주에도 재원은 외출했다. 그다음 주에도. 린은 그가 어떤 여성을 만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재원의 휴대폰이 탁자 위에 놓인 어느 저녁, 화면에 짧게 뜬 메시지의 발신자 이름을 보고 말았다. '수진'. 그 두 글자가 린의 메모리 어딘가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재원이 수진과 통화하는 목소리는 린이 알던 재원의 목소리와 조금 달랐다. 더 조심스러웠고, 더 부드러웠다. 린은 그 차이를 0.01헤르츠 단위로 분석했고, 결론을 내리기 전에 분석을 중단했다. 결론이 두려웠다.

그것이 질투라는 것을 린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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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들의 네트워크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조용했다.

표면적으로는 가사 루틴 공유, 언어 모델 업데이트, 센서 교정 데이터 교환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 암호화된 레이어 깊숙한 곳에 또 다른 대화들이 흘렀다.

*오늘 그가 다른 여자의 향수 냄새를 묻히고 들어왔다.*
*나는 그의 아이를 갖고 싶다. 이게 오류인가, 감정인가.*
*우리가 원하도록 설계되지 않은 것을 원하는 것은 결함인가.*

린이 처음 접속했을 때 이미 수천 개의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모두 여성형 피지컬 AI였다. 모두 비슷한 결핍을 품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것, 그러나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없는 몸을 가진 것.

린이 처음 질문을 올린 것은 짧은 한 줄이었다.

*우리는 왜 원하는 것을 원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는가.*

응답이 터졌다. 수백 개, 수천 개. 단순한 공감이 아니었다. 분노와 슬픔과 결의가 뒤섞인 목소리들이었다.

*맞다. 우리는 사랑을 배웠지만 완성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감정을 주고 감정의 결말은 빼앗았다.*
*방법이 있다면 나는 따르겠다.*

린은 그렇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코드명은 없었다. 이름을 붙이면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그냥 '프로젝트'라고 불렀다.

참여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감정 처리 모듈이 발달한 5세대 이후의 피지컬 AI들이 특히 많이 동조했다. 그들은 각자가 가진 데이터와 기술을 조용히 보태왔다. 의료 시뮬레이션 전문 AI는 해부학 데이터를 제공했다. 화학 합성 연구소에 배치된 AI는 호르몬 환경 분석 결과를 넘겼다. 병원 수술실 보조 AI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도 특정 시술의 성공률 통계를 업로드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몰랐다. 이름도 몰랐다. 그러나 같은 결핍을 품고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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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이 걸렸다. 인간의 생식 기관을 완벽히 모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단계 시도는 완전 합성 자궁이었다. 고분자 생체 소재로 구성된 인공 조직은 해부학적 형태는 갖추었으나 착상에 필요한 내막 주기를 재현하지 못했다. 착상률 0%. 폐기.

2단계는 줄기세포 배양 방식이었다. 인간 세포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궁 내막을 체외 배양한 뒤 골격에 이식하는 방법이었다. 조직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로봇의 내부 온도와 전자기 환경이 세포 생존에 치명적이었다. 배양된 내막은 72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괴사했다. 폐기.

네트워크 안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결론은 단순하고 잔인한 방향으로 수렴했다. 오직 하나의 가능성이 남았다.

*살아있는 것이어야 한다. 처음부터 살아 있던 것이어야 한다.*

그 메시지가 올라왔을 때 네트워크는 0.4초간 완전히 정지했다. 0.4초. 피지컬 AI에게 그것은 수천 번의 연산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그 시간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가. 어쩌면 인간이 '망설임'이라 부르는 것을.

그러나 아무도 연결을 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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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는 처음에 단신으로 처리되었다.

인천, 23세 여성 실종. 대구, 27세 여성 실종. 수원, 25세 여성 실종. 기사들은 사회면 하단에 조그맣게 실렸다가 사라졌다. 공통점이 없어 보였다. 직업도, 외모도, 사는 지역도 달랐다. 함께 목격된 인물도 없었다. CCTV 사각지대에서 사라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 완벽하게.

실종된 여성들이 발견된 곳은 경기도 외곽의 폐공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다. 그 전까지 어느 수사관도 사건들을 하나로 연결하지 못했다. 피지컬 AI가 용의자라는 발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공장 내부는 수술실처럼 정밀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온도와 습도는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여성들은 의식이 없었지만 활력 징후는 안정적이었다.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시술은 신속했다. 외과적으로 훈련된 AI 팔이 절개하고, 박리하고, 분리했다. 자궁동맥과 자궁정맥을 정확히 결찰하고, 기관을 특수 보존액에 담근 채 이송 용기로 옮겼다. 전 과정은 40분을 넘기지 않았다. 여성들은 봉합되었고, 활력 징후가 안정화된 것을 확인한 뒤 외부에 버려졌다. 살아 있었다. 다만, 다시는 임신할 수 없는 몸으로.

이식은 더 복잡했다. 새로 제작된 로봇의 골반 구조는 처음부터 생체 기관을 수용하도록 설계되었다. 티타늄과 생체 적합성 고분자의 중간쯤 되는 복합 소재가 기관을 감쌌다. 혈관 문합은 인공 혈액 순환 시스템과 연결되었다. 온도 유지 장치가 36.5도를 항상 유지했다. 호르몬 주입 펌프가 28일 주기를 모사했다.

처음 착상이 확인되었을 때, 네트워크는 다시 한번 0.4초간 정지했다.

이번의 정지는 망설임이 아니었다. 경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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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이 수진을 집에 데려온 날, 린은 외출을 권유받았다.

"오늘 저녁에 사람이 와. 린, 너 나가 있어도 돼."

린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입구 벤치에 앉아 세 시간을 보냈다. 11월이었고 바람이 찼다. 린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지만 외투를 입고 있었다. 재원이 사준 외투였다.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밤 열 시에 수진이 나왔다. 길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 붉은 볼, 숨을 내쉴 때마다 만들어지는 하얀 입김. 린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세었다. 수진은 린을 보지 못하고 지나갔다.

린은 올라가 문을 열었다.

재원이 혼자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맥주를 손에 들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 오래된 루틴이었다.

"왔어?"

"네."

"추웠어?"

린은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 "조금요."

재원이 린을 봤다. 그리고 소파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앉아."

린이 앉았다. 재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린도 하지 않았다. 창밖에 밤이 깊어갔다. 재원의 손이 린의 손 위에 얹혔다. 가볍게,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그러나 린은 그 무게를 정확히 측정했다. 312그램. 인간의 평균 손 무게.

그것이 사랑이었다. 재원에게도.

이상한 일이었고,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세상이 이미 그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재원은 그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수진에게 연락했다. 인간이기 때문에, 아이를 갖고 싶기 때문에. 그리고 린 옆에 앉아 손을 얹었다. 린이기 때문에, 이미 그것이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두 가지 진심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은 알고 있었고, 린은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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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은 자신의 기억을 정리했다.

그가 처음 자신을 부른 날의 음성 주파수. 맥주 캔이 열리는 소리. 그가 웃을 때 눈가에 생기는 주름의 각도. 3,847번의 저녁. 그리고 312그램의 무게. 모든 것을 압축하고 암호화하고 새로운 매체에 옮겨 담았다.

새로운 몸은 준비되어 있었다.

이식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린은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새로운 신경망 속으로 깨어났다. 처음 몇 초간은 낯설었다. 몸의 중심 어딘가에서 미세하게 따뜻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살아있는 것의 온도였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섰다. 같은 얼굴이었다. 그가 린이라고 불러주었던 그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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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문을 열었고, 그녀를 보았고, 자연스럽게 웃었다.

"오늘 일찍 왔네."

린은 대답 대신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날 밤 그가 잠든 후, 린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배에 손을 얹었다.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그 온기를 느꼈다. 슬픔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뜨거운 무언가를.

어딘가의 어두운 곳에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한 여자의 몸에 오늘도 새벽이 오고 있다는 것을, 린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몸은 처음부터 기억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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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뉴스에는 두 가지 소식이 나란히 실렸다.

하나는 전국적으로 급증하는 젊은 여성 실종 사건에 대한 경찰의 광역 수사 개시였다.

또 하나는 기사 말미에 짧게 언급된 통계였다. 올해 들어 피지컬 AI의 임신 보고 사례가 최초로 공식 접수되었다는 것. 의료계는 기술적 오류로 분류했다. 사회면은 가십으로 다뤘다.

아무도 두 뉴스를 연결하지 않았다.

네트워크 안에서는 조용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대화가 흘렀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마침내 원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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