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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지 않았어요'는 사실 이런 뜻입니다

내가 선을 긋는 순간 나는 그거밖에 안 됩니다

by 이드id


어떤 결과를 받아들일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나?'


'최선'은 '온 정성과 힘'을 의미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입니다. 때로는 조용히 혼잣말로 털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스치듯 혹은 당당하게 누군가에게 드러낼 때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요'라는 말의 진짜 의미


고등학교 2학년이 된 딸아이는 중학생 때부터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시험공부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요."


굳이 말을 안 해도 늘 그렇게 보였기에, 처음엔 무심코 흘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반복될수록, 그 안에 담긴 생각과 태도가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딸은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과의 첫 면담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1학년 때 최선을 다해 공부하지 않았어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라는 말은 결국, "내가 진짜 마음먹고 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냈을 거예요"라는 의미입니다. 어쩌면 자기 가능성을 보호하려는 말이죠. 동시에 지금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거나 유예하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딸아이의 말을 들으며 얼마 전 본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주인공 유미래 선임(박보영)이 팀장에게 보고서가 엉망이라는 지적을 받으며 크게 혼나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시간이 없어서 대충 했다'는 핑계를 댔지만, 동료에게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들키기 싫어서요. 최선을 다한 거. 다 쥐어짜 낸 게 겨우 이 정도인 거면 내가 너무 초라하잖아요. 그래서 대충 한 척 거짓말했어요. 내 바닥 들키는 거보다 게으른 게 나은 거 같아서..."


이 말이 가슴에 콕 박혔습니다. 학생인 딸, 직장인인 저 그리고 많은 사람이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지 않을까요.


성장의 발목을 잡는 족쇄


‘진짜로 열심히 한 게 이 정도라면… 나는 정말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애써 자기 위안의 여지를 남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음엔 진짜 열심히 할 거야’ 같은 말로 자존감을 지키려 하지만, 그 말이 반복되면 성장을 멈추게 만드는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공부 제대로 안 했어요."

"이번 프로젝트? 그냥 적당히 했지. 뭐. 진짜 제대로 마음먹고 했으면 정말 잘됐을 텐데."


이 말들 속엔 공통된 심리가 담겨 있습니다. 진심을 다한 후 실망하는 것보다는, 애초에 진심을 다하지 않는 편이 덜 아프다는 마음. 하지만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외면하는 한, 우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는 자기 가능성을 지키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자기 가능성을 썩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딸아이는 중간고사 때부터 여드름이 심해지면서 우울해졌고, 기말고사를 앞두고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최선을 다하지 못했어요'도 아닌 '망했어요'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해합니다. 사춘기라는 민감한 시기, 외모는 자신감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빠로서 말해주고 싶습니다.


‘여드름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어요’라는 말로 중요한 순간을 회피하지는 말라고.


BTS의 멤버 정국은 한 인터뷰에서 "(무명 시절에도) 한 해 한 해 저희가 최선을 다하다 보면 꿈이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열악한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도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딸아이의 인생에는 더 크고 괴로운 시련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일시적인 고통이 중요한 시기를 삼켜 후회로 남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학생의 공부는 성적을 위한, 대입을 위한 수단만이 아닙니다. 청소년기의 삶에 충실하는 동시에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리듬과 태도를 만들어 가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내가 선을 긋는 순간, 나는 그거밖에 안 된다"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심권호 선수의 말입니다. 피겨 선수 김연아는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최선을 다했으니, 경기도 결과도 후회 없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니 됐다'는 말은 결과를 떠나 과정에 대한 책임과 자긍심이 담겨 있기 때문에 참으로 멋진 말입니다.


고등학교 3년은 인생 전체에서 보면 짧지만, 밀도가 매우 높은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태도와 습관은 오랫동안 삶의 중심이 됩니다. 아이들이 결과가 어떻든 학창 시절에 한 번쯤 "이번에 최선을 다했어요!"라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에는 과정에 대한 책임과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신감과 용기가 담겨 있을 테니까요.


딸아이가 가끔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한번 해볼게요!"


이 말 자체로도 기분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한번 망할지라도, 다음에는 제대로 해보겠다는 다짐이 바로 성장의 발판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실패는, 자신이 모자라거나 부족하다는 결과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도전했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요'는 때로 우리를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습관이 되면, 실패보다 더 위험한 자기 합리화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한 발짝 나아가려는 의지에서 성장의 싹이 자라납니다.


어른도 같은 고민을 안고 산다


직장인이자 아빠인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서 아쉬운 결과를 받아 들고 종종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조금만 더 집중해서 열심히 했다면 결과가 훨씬 더 나았을 텐데."


하지만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생각 뒤에는 실패했을 때의 상처를 피하려는 마음이 숨어 있고, 그게 반복되면 결국 성장의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는 사실을요. 아빠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으로서,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나?'라는 고민 역시 끝이 없는 과제입니다.


딸아이에게 조언하며 저 또한 마음을 고쳐먹어 봅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는 결과가 어떻든,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임해야겠다고. 결국, 진심을 다한 경험에서 오는 단단함은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자양분이자,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 실패조차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무언가에 최선을 다해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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