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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Dec 18. 2024

이름의 의미

애정을 담아 가족과 친구의 이름을! 시민의 품격으로 사회적 이름을!

이름으로 관심과 애정을 전할 수 있는 목소리, 개인적 이름! 명칭으로 그 시대를 판단해도 부끄럽지 않은, 사회적 이름!  애정을 담아 가족과 친구의 이름을! 시민의 품격으로 사회적 이름을! 이름이 이름 값하는 세상을 그려 본다.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은 '잡채'다. 강아지 이름을 초코, 두부, 땅콩, 쿠키 등 먹거리로 지으면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어 음식 이름이 많지만 '잡채'는 그중 흔하지 않은 독보적인 이름이다. 동물병원에서도 수의사선생님의 관심을 끌만한 이름이라 종종 이름을 어찌 그리 지었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6년 전 강아지 입양을 결정하고, 가정 분양을 알아볼 때, 우리는 강아지 이름을 먼저 짓게 되었다. 늦은 밤, 온 가족이 모여 예능프로(tvN 윤식당)를 즐기며 강아지 입양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외국인을 매료시킨 음식 '잡채'가 화면을 가득 채웠을 때 우리는 모두 침을 꼴깍거렸는데, 급기야 나는 냉장고털이를 하여 그 밤 아이들에게 뚝딱 '잡채'를 대령했었다. 우리 가족은 '잡채'를 맛나게 먹으며 이심전심으로 강아지 이름을 떠올렸다. 여러 채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기가 막힌 맛을 내는 '잡채'처럼 진돗개와 웰시코기가 아름답게 믹스된 시고르자브종 강아지'잡채'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온 것이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순수한 우리말로 딸들의 이름을 짓고 싶었다. 토박이 말을 찾아 소담, 은별, 도담이라는 이름을 지은 후 국어 교사로서 엄청 뿌듯했다. '탐스럽고 풍성하게'라는 뜻을 담은 소담, '은은하게 빛나라'는 은별, '무탈하게 무럭무럭 자라'는 도담까지.... 부모의 사랑과 기도를 담은 내 자식의 이름이다.


 결혼한 지 30년이 넘은 나는 남편을 '형'이라고 부른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민주화를 열망한 우리에게 이성 간의 호칭은 선후배를 막론하고 '형'이었다. 오빠, 누나라는 호칭을 배제한 것은 오로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그 무엇보다도 강했던 세대이기에 오빠를 오빠라 부르지 못하고 누나를 누나라 부르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남편을 익히 부르던 대로 '형'이라 칭한다. 송년회에서 만나는 남자 후배는 나를 '형'이라 부르고, 나도 환갑이 넘은 선배에게 자연스럽게 '형'이라 부르며 오랜만에 친목을 다지는 우리 세대 모습이다.


 이름은 '어떤 사물이나 단체를 다른 것과 구별하여 부르는 일정한 칭호'라 사전에 풀이되어 있다. 어느 것을 어떻게 지칭하냐에 따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의미, 더 나아가 그 시대의 수준과 그 사회의 품격까지도 규정하는 것이 '이름'이다.


 나는 중고교시절,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사태'로 배웠다. 그 시절 수업 시간에 우리에게 그런 이름으로 두 사건의 이름을 칭한 사회선생님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삼엄한 시국이었지만 사적으로라도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살짝 귀띔으로라도 제대로 알려주었다면! 늘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떠올리는 시절이다.

 그런데 그 망령된 이름이 2024년에 다시 살아나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까지 울려 퍼질 줄은 정말 몰랐다. 국내 일부 보수단체들이 그곳까지 몰려가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규탄하며 시위를 벌였다니, 오명의 과거형으로만 알던 이름이 귀신처럼 살아나 그들의 입에서 '폭동, 사태, 빨갱이' 으로 재연되는 소리를 들으니 소름이 돋았다. 


 2009년생인 우리 반 아이들과도 그 사회의 수준을 드러내던 과거 '이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장애인을 불구자로 부르던, 불우이웃 돕기의 불우라는 이름으로 소외계층에서 더 큰 상처를 주던, 동물을 애완으로 이름하여 생명을 놀잇감으로 취급하던 그 폭력의 시대를 아이들 앞에서 드러내자니 부끄러웠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발전된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유모차 대신 유아차로, 출산율 대신 출생률로, 애완 대신 반려 등등으로 차별과 편견과 몰이해를 이름에서 걷어내고 있다.

  파출부, 결손 가정, 정신지체 등 후진성을 담은 과거 이름에서 어찌 상식과 존중과 이해를 찾을 있겠는가!


 우리가 흔히 쓰는 명사에도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근로자(勤勞者) 같은 명사에도 '힘을 들여 부지런히'라는 생각이 들어가 있다. 부지런하든, 능력 발휘를 잘하든 상관없이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임금을 받아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는 중립적인 뜻을 담은 '노동자'라는 이름이 훨씬 공정하고 객관적임을 밝힌다.

 이처럼 중립적이고 가치 판단을 배제한' 이름'들이 자리를 잡고, 그 쓰임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는 공평하고 정의로운 살맛 나는 세상을 이룰 것이다.

 

 사소한 개인적인 관계에서 불리는 이름이든, 국가적, 사회적 관계에서 쓰이는 이름이든 그것을 지칭하는 태도나 의미가 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정하는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가족이나 친구의 이름을 불러주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민주 시민의 품격으로 사회적 명칭을 정의해서, 모든 이름들이 그 자리에서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60년대 생인 나의 이름은 '현숙'이다. 희숙이, 은숙이, 정숙이 등 그 시대 흔한 숙(淑) 자 돌림 중 하나지만 부모님의 고귀한 뜻을 지닌 이름이라 생각한다. '어질고 맑게'라는 이름이 지닌 뜻대로만 산다면 내 인생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이름으로 관심과 애정을 전할 수 있는 목소리, 개인적 이름! 명칭으로 그 시대를 판단해도 부끄럽지 않은, 사회적 이름!  애정을 담아 가족과 친구의 이름을! 시민의 품격으로 사회적 이름을! 이름이 이름 값하는 세상을 그려 본다.


이 글은 12/18(수) 오마이뉴스에 실렸습니다.

https://omn.kr/2bii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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