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봄-여름. 3달간의 유럽
이건 지울 수 없는 거죠?
호스텔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된 스무 살 남짓의 여자아이가 내 필름 카메라를 보고 물었다.
'필름'이라는 것을 들어보기는 했으나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필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특별한 취미까지는 아니었지만 아빠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셨고, 자연스레 어릴 적부터 아빠의 카메라를 보며 자랐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 영상을 전공하게 되었고, 1학년 사진 수업에서는 필름 카메라가 필수였다. 그렇게 아빠가 옛날에 쓰던 카메라를 다시 찾게 되었다. 수업에서는 매주 사진을 찍는 것이 공부였고, 필름 로딩부터 현상, 인화까지 직접 하느라 학기말에는 밤새 현상실에 들어가 있기 일쑤였다. 카메라 수리나 필름 사는 곳 등은 단골 가게가 있을 정도로 들락거렸다. 그렇게 나의 20대 초반은 필름이 자연스럽다 못해 지긋지긋할 정도로 함께 한 존재였다.
DSLR이 보편화되고, 성능 좋은 컴팩트 카메라에 휴대폰 카메라까지.. 차츰 필름 카메라를 놓게 되었다. 그러다가 아주 오랜만에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며 문득 필름 카메라를 다시 찾게 되었다. 왠지 유럽이라면 필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떠나기 전에 부랴부랴 필름 파는 곳을 찾고, 몇 년간 묵혀뒀던 카메라를 무작정 들고 갔다.
시대가 빨리 변한다고는 하나 몇 년 사이에 필름을 모르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조금 아니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이 필름을 이렇게 빼서 넣고.. 찍고 또 감고.." 더듬더듬 설명을 하는 내게 그 아이는 지울 수 없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지울 수 없는 거야.
사실 필름 카메라와 함께 한 여행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2012년 유럽여행에 가져간 필름들은 3달 동안 이고 지고 다니기 만만치 않은 부피였으며, 카메라는 부피가 큰 DSLR보다 훨씬 무거워 사진을 많이 찍은 날은 팔이 다 아플 정도였다. 결정적으로 테스트도 안 해보고 가져간 카메라는 몇 번의 말썽을 부렸다.
첫 번째는 여행 20여 일 즈음,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어느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던 중 느슨해진 부품 하나가 사진을 찍는 중 튕겨나가 바로 다리 아래 강으로 빠졌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아주 간단한 부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 없이는 사진 찍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다음 목적지인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니콘 수리센터를 수소문해서 찾았고, 아날로그의 도시 파리에서도 더 이상 필름 카메라는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사설수리센터를 찾아 4-5만 원의 거금을 들여 부품을 샀다. 여행자에게 몇만 원의 돈과 반나절 이상의 시간 투자란 얼마나 아깝던지..
두 번째는 여행 중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FC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인 캄프누를 찾았을 때였다. 축구에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지만 명문구단의 홈에는 한번 방문해 보고 싶었다. 대부분 혼자 찾은 사람들이 많아 서로 눈빛만 보고도 알아서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등 재미있게 구경했다. 실제 경기장을 둘러보는 코스는 관광객들이 갈 수 있는 범위가 지정되어 있었는데, 관중석에서 사진을 찍고 카메라를 정리하다가 랜즈 캡이 그만 2-3줄 앞의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다. 서둘러 경기장 직원을 찾아 설명을 했는데 제한구역이니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코앞에 떨어진 렌즈캡이 보이는데도 줏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FC바르셀로나에 나의 렌즈캡을 기증(?)하고 나왔다.
세 번째는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몇 년간 묵혀뒀던 필름 카메라를 그냥 들고 갔더니 몸이 덜 풀린 카메라는 맥을 못 췄다. 정확히 말하면 셔터의 문제가 생겨 사진이 아예 안 찍혔거나 반만 찍혔거나 등 제대로 나오지 않은 사진이 많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필름을 처음 확인했을 때엔 그야말로 멘붕상태였다. 몇 년이 지나고 보니 지금은 나름대로의 추억이 되었지만, 당시엔 몇 달간의 노력과 추억이 헛수고로 돌아가는 듯했다. 최고의 순간은 사진으로 담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때로는 기억에서 잊혀도 사진으로 추억이 되는 순간들이 있어서 그래도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하는 듯하다.
근래에 떠난 여행들은 무엇인가에서 도망치듯이 떠났었다. 새로운 것들을 만난다는 설렘도 있었지만 '지금, 여기'보다 다른 곳에 가고 싶었다. '이곳의 것'들을 모두 놓아버리고 싶어 최소한의 짐을 챙겼고, 마음의 짐 또한 내려놓고 갔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그와 중에도 빠짐없이 챙겼던 것이 필름 카메라다.
필름은 되돌릴 수 없다. 찍고 나서 바로 확인할 수도 없다. 한 컷을 찍을 때마다 조금은 더 신중하게 되고, 그만큼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름 카메라가 가끔씩 생각나고, 다시 찾게 되는 큰 이유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몇 번의 터치에, 클릭에 쉽게 버려지는 세상에서 유형의 존재로 남아있다는 것이 조금 더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에 남을 수 있지 않을까.
가끔은 지우고 싶은 기억도, 지워야 하는데 지워지지 않는 추억도 남아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