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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지 Jan 19. 2024

04. 따뜻한 눈

“이렇게 마주 보고 고맙다고 말해본 적 있어요?”

반딧불이를 따라 걷다 보니 주변이 조금씩 밝아졌다. 꿈속 세계는 남색빛으로만 이루어진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딱히 이곳을 둘러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었다.

“이곳 색깔은 남색 하나뿐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꽤나 다채롭네요? 예쁜 반딧불이 불빛도 있고, 하얀 눈도 쌓여있고.”


탐정의 말처럼 길에 드문드문 쌓여있는 눈이 보였다.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하늘이 밝아지는 만큼 조금씩 추워지고 있었다. 문득 한기가 느껴져 ‘추운 건 싫은데.’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일정한 속도로 날아가던 반딧불이가 갑자기 파르르 떨더니 저 앞에 쌓여있는 눈 더미 안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나와 탐정은 놀라 반딧불이가 달려든 눈 더미로 달려갔다. 탐정이 눈 더미에서 반딧불이를 건져 올렸다.

“어? 따뜻해요!”

난 무슨 말인가 싶어 탐정이 들어 올린 손바닥을 보았다. 탐정의 손바닥 위에서 반딧불이가 눈에 몸을 비비고 있었다. 난 반딧불이가 파묻혔던 눈에 손을 넣어보았다. 정말 따뜻했다.

“눈이.. 어떻게 따뜻하죠?”

내 질문에 탐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는 놀이터네요?”

그때서야 나도 반딧불이만 쫓던 눈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끄럼틀 하나와 그네 두 개, 그 옆에는 흰색 철봉 세 개가 높이 별로 나란히 놓여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정글짐과 시소도 한 쌍 있었다.

“오와 정글짐이다!!”

몸을 다 녹인 반딧불이가 다시 날아오르자 탐정은 신나게 정글짐으로 뛰어갔다. 어린아이다운 모습이었다. 탐정은 금세 정글짐을 타고 올라가 꼭대기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봤다.

“당신도 올라올래요?”

“아뇨. 전 괜찮아요.”

나는 정글짐 옆에 있는 시소에 앉았다.

“정글짐 싫어해요?”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에 힘들 때마다 쉬어가려고 놀이터에 왔었어요. 그때마다 정글짐을 오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나만 꼭대기로 올라가지 못하고 뒤쳐지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았거든요. 그래서 그냥 전 여기에 앉아있을게요.”

탐정은 슬그머니 정글짐에서 내려와서 내 맞은편에 자리에 앉았다. 탐정이 더 가벼운 탓에 시소는 내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어요?”

“고맙게도 놀이터에서 종종 같이 시간을 보내던 친구가 한 명 있었어요. 저랑 같은 꿈을 꾸던 친구인데, 놀이터에서 만나면 둘 다 아무 말 없이 앉아있다가 돌아가곤 했어요.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놀이터에 같이 앉아있는 날은 덜 추웠던 것 같아요.”

나는 발로 땅에 쌓인 눈을 긁어내며 덧붙였다.

“그 겨울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건 그 친구 덕분이에요.”

그러면서 친구를 떠올려보았다. 대학 때부터 지금 함께 일하는 회사에서까지, 생각해 보면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는데도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놀이터에서 만났을 땐 같은 곳을 바라보기만 했지 마주 본 적은 없었다. 회사에서도 친구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다.


“으앗?”

갑자기 몸이 들어 올려졌다. 앞을 보니 탐정이 시소 의자 위에 서서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몸은 가벼웠지만 뜀박질을 해대니 내 몸이 들썩였다. 몸이 더 흔들리지 않도록 땅에 발을 디뎠다. 이제 시소는 수평을 이루었다.

“이렇게 마주 보고 고맙다고 말해본 적 있어요?”

탐정이 말했다.

“아뇨.”

나는 대답했고,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시 친구를 만날 수 있다면, 한 번 더 영화를 보러 가자는 제안을 받는다면, 그땐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볼과 손에 내려앉은 눈이 따뜻했다. 따뜻한 눈을 만지작거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탐정이 물었다.

“그 친구 덕분에 당신 꿈속에서는 이렇게 따뜻한 눈이 내리는 걸까요?”

차가운 눈의 온도를 바꾸고 힘들었던 시기를 따뜻한 감정으로 바꿀 만큼 그 친구가 나에게 중요한 존재였나? 나는 눈이 내리는 하늘 위를 올려다보며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늘 위로 올라가 볼래요?”

갑작스러운 탐정의 질문에 무슨 말이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탐정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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