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성준의 리뷰] - 『세상을 움직이는 글쓰기』
동방불패가 영화로 만들어질 때 원작자 김용은 서극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임청하 캐스팅을 반대했으나 서극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결국 작품성과 흥행성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용은 왜 임청하를 반대했을까. 규화보전을 익혀 점점 여성화되어가는 동방불패 역을 맡기엔 임청하의 미모가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1990년대 홍콩 무협영화의 부활을 이끌었던 《동방불패》에 등장하는 '규화보전(葵花寶典)'은 주위의 모든 것을 조종해서 무기로 삼을 수 있는 절대무공의 비급이 들어 있는데 거세를 해야만 익힐 수 있다는 치명적 단점 때문에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 있던 책이다. 그러나 야심으로 똘똘 뭉친 동방불패는 주화입마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남성성까지 포기해가면서 그 책을 구해 무공을 익혔던 문제적 인물인데 그런 주인공 캐릭터를 임청하는 너무나 매력적으로 그렸다. 특히 이 영화는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 모두가 정의나 의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점에서 매우 현대적인 매력을 지닌 작품이었다.
내가 갑자기 《동방불패》를 떠올린 이유는 이번에 메디치에서 나온 이진수의 『세상을 움직이는 글쓰기 : 정치 글 쉽게 쓰는 법』이 딱 규화보전을 닮았기 때문이다. 규화보전에 강호를 휘어잡을 도술 비급이 들어 있던 것처럼 이 책엔 말 그대로 세상을 좌지우지할 글쓰기 비법이 들어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세상엔 온갖 글쓰기 책들이 이미 널렸지만 이렇게 세상을 움직이는 정치 글을 쓰는 법을 알려주는 책은 없었던 게 사실이다.
정치는 말과 글로 하는 싸움이다. 따라서 ‘정치 글’은 정치하는 사람들의 무기다. 그들의 말과 글은 법과 정책으로 변하고 결국 시민의 삶을 변화시킨다. 정치 글이 세상의 다른 모든 글보다 영향력이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인데 이런 중요한 글을 구상하고 효과적으로 쓰는 비법으로 가득한 책이 일반 서점에서 팔리고 있다니, 놀랄 노 자가 아닌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어깨에 힘을 빼고 쉽게 쓰는 사람이다. 멋있어 보이려 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꺼내 놓으며 대중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매력적이다 그래서 많은 연예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요즘은 정치인들도 SNS에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며 팬을 확보하기에 열을 올린다. 그렇다면 정치인도 이렇게 소박하고 감성적인 글을 올릴 수 있는 것 아닐까?
“오늘 운동복 차림으로 국회에 출근했다. 이번 주는 지역구에도 못 내려가고 휴일도 잊은 채 국정감사를 준비하고 있다.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 공정거래위원회에 이어 다음 주부터는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국가권익위원화 등 45곳의 정부 기관을 감사할 예정이다. 가끔 고개 들어 창밖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보며 아쉬운 가을의 끝자락을 잡아본다.......”
책에서 제시한 이 예시문 밑에 이진수는 "이렇게 쓰는 건 그냥 일기다. 정치인의 글은 이렇게 독백하듯 주절주절 쓰면 안 된다."라고 잘라 말한다. 정치인이 쓰는 글은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상대방의 부당함을 공격하는 것이든, 자신의 대의를 선전하는 것이든, 아니면 같은 주장이라도 남과 다른 새롭고 날카로운 시각을 제공하든지 아무튼 셋 중 하나는 해야 기자들의 눈에 띄어 기사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정치 현안에 대해 파악하고 싶으면 신문을 읽었지만 이제는 거꾸로 신문기자들이 정치인들의 SNS 글을 그대로 가져가 기사로 쓰는 세상이다. 즉, 신문기사보다 정치인들의 SNS 포스팅이 더 '핫'해졌다는 얘기고 언론사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아서 기자들의 자부심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심지어 저자는 요즘 신문은 함량 미달이나 편견으로 가득한 기사가 많아서 오히려 조심해야 할 지경이라고 충고한다.
예전엔 엘리트들이 주로 글을 썼다. 지식으로 무장한 그들은 자신이 아는 걸 다 말하고 싶어하는 습성 때문에 글이 길어지거나 어려워지기 일쑤였고 글쓴이가 진흙탕에서 함께 뒹굴며 싸우는 걸 극도로 꺼렸다. 그러나 이제는 스마트폰 덕분에 누구나 글을 쓰고 읽으며 실시간으로 의견을 주고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정치인이라고 해서 늘 옳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거나 학처럼 고고할 필요는 없다.
어떤 정치인이 쓴 글의 주장이 조야하거나 논거가 박약해서 비난을 받는다면 그건 글쓴이의 잘못이다. 다시 써야 한다. 그러나 당파성이 달라서 받는 공격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오히려 잘 쓴 글이라는 증거이므로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정치 글은 그런 것이다. 논문이 아니다. 완벽하게 쓰는 것보다는 시나 소설처럼 '잘 팔리게' 써야 한다. 아무리 글을 잘 써도 대중에게 전달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태준의 『문장강화』에도 "글은, 사상인 것이나 감정인 것이나, 자기 마음속엣 것을 꺼내어 남에게 전달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잘 전달되는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하야 할까. 그것도 정치 글을 써야 한다는데.
얼마 전 젊은 나이에 당대표에 오른 야당 정치인이 인터뷰에 나와서 "정치를 시작한 이후로는 너무 바빠 책을 거의 읽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정치인이 되면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시간에 바로 현장을 누비는 게 낫다는 인식이 크다.
그러나 이진수는 정치인이야말로 가장 치열하게 책을 읽고 공부한 하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어떤 문제든 단순하지 않다. 흑백논리를 벗어나 사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이 있어야
정곡을 찌르는 의견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어디에다가 내느냐고?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가 정치인의 일기장이요 정견발표장이고 격전지다.
사실 정치 글은 정치인 혼자 쓰지 않는다. 함께 움직이는 보좌관이 써야 할 때가 더 많다. 정치인은 그걸 읽고 자기 의견을 더하거나 바꾸면 된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정치 글은 문장력만으로 써지지 않는다. 정무와 정책을 두루 알지 못하면 안 된다. 더구나 눈 돌아가게 바쁜 정치 현장 아닌가. 보좌관으로 시작해 국회 경력 27년째인 이진수는 그럴수록 정치인은 늘 옆구리에 책을 끼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공부하고 고민하고 자신만의 대안을 꾸준히 준비하는 게 정치인의 기본인데 그러기에 책만 한 게 없다는 것이다.
정치 글쓰기 책이라고 뭐 다른 얘기가 특별히 있을까 싶었다. 아니다 다를까 어깨 힘을 빼고 쉽게 써라, 늘 메모해라, 맥락을 파악해라, 두괄식으로 써라 등등 그동안 글쓰기 교실에서 들어봄직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딱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정치는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니 정치 글도 목숨 걸고 써야 한다는 것이다. 글은 글쟁이가 쓴다고? 천만에. 글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쓰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생각을 가진 정치인을 원한다. 문제의식이 없는 정치인은 이미 정치를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정치·시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치적 식견이나 통찰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대량의 정보와 경험을 논리정연하게 책으로 엮어내는 공력은 아무나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책은 저자 이진수가 하루 예닐곱 시간씩 써내려 간 글이다. 《오마이뉴스》의 이한기 국장은 페이스북 글에서 학보사 시절부터 봐왔던 선배 이진수의 책을 강력 추천하며 '그는 남에게 빚지는 것과 쪽팔리는 걸 죽을 만큼 싫어하는 성정이어서 독자가 본전 이상을 뽑지 못할 책을 낼 리가 없다. 만약 그렇게 느껴 저자에게 환불해달라고 하면 환불해줄 양반이다. 그것도 시한을 두지 않고.'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시한을 두지 않고 책을 천천히 다시 읽은 뒤 환불 요구를 한 번 시도해볼까 생각 중이다. 이미 나는 본전을 다 뽑은 책이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