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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다리필름 Sep 22. 2020

다시 그 자리, 희망으로

위기를 기회로.


그 시작은 미약했었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취업한 곳은 동네 학원. 교실에 학생 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나는 원장의 아들, 또 하나는 그 아들의 친구였다. 그렇게 나는 뒷골목의 영어학원에서(당시 영어 강사들은 이런 걸 ‘밤무대’라고 불렀다) 시작해 15년인가 만에 EBS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지속된 15년의 방송 강사 생활은 절반의 환희, 절반의 연옥이었다. 강사로썬 알려졌지만, 비즈니스맨으로썬 엉망이었다. 출연료로 받은 꽤 많은 돈을 다 쓸어 넣고도 빚을 수 십억이나 졌으니까.



그 말로는 더 초라했다. 몸으로 벌어 그 빚을 갚은 세월이 다시 15년, 2015년의 나는 종로 뒷골목의 어느 학원에서 학생 몇을 앉혀 놓고 하루 종일 강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밤 무대(?)로의 귀환. 노인과 바다. 이룬 건 보이는데 남은 건 없다. 그리고 영상으로의 전직... 아니 계급장 떼고 바닥부터 다시 뛰자고 생각한 건 그리 빨리 죽을 것 같진 않아서 (10년 전 대장암을 앓았으나 생각 보다 건강을 잘 유지했기에)였다. 중년의 데쓰 벨리를 겪고 있는 어깨 쳐진 남자에게 엔간해선 말로 꺼내지 못하는 비밀의 소망이 움텄다. 그건, ’50대가 낯선 분야에서, 이젠 낯선 세상이 되어버린 곳에서 다시 싸워 일어나는 것을 중년(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서, 유능감과 효능감을 잃어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먹고사는 문제 말고 뭐라도 지구에서 보람을 찾을 게 있다면 이젠 그것이었다.






뻥카와 욕심을 던지고


청년 시절 그런 유명한(?) 얼굴을 가지고도, 매번 사업에 실패한 이유는 첫째도 허세, 둘째도 허세, 셋째도 허세였다. 비즈니스맨이라면 현실에 기반해 옹골차게 움직여야 하는데, 난 펄럭거리고 다니면서 멋져 보이는 것을 사랑했다. 그 덕에 청춘을 빚 갚는데 다 소모했지만, 이젠 철든 머리통으로 절대 안 할 자신 있는 게 허세요 과욕이었다. 유튜브 대학(?)에서 영상 제작을 전공(이라고 할 만큼) 지독하게 파고 또 파서. 첫 두 해에 쓸만한 포트폴리오를 꽤 만들었다. 사무실 세낼 돈이 없어서 카페 한구석에서 점점 짐을 불리다가 카페 주인이 우리 짐을 어느 날 창고로 내다 버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여하튼 실패를 맛본 중년 아재의 ‘겸손한’ 사다리 필름은 젊은이들과 힘을 합치며 SNS 광고 영상에서 브랜딩 영상(이건 좀 높은 제작 기술이 요구된다), 다시 유튜브 시대를 타고 유튜브 전문 영상 회사로 슬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작년 말, 이상한 손님이 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나뭇잎 배를 찾아오신 항공모함


대기업 L사의 사내 교육전문 자회사라고 했다. 교육 영상을 예능 포맷으로, 또는 다큐 포맷으로 시리즈로 연간 제작하는데 아예 기획부터 참여해 달라고 했다. 우리를 어떻게 알고 오셨냐고 하니까, SNS에서 계속 지켜봤다고. 그리고 난해한 걸 재미있게 제작할 곳은 여기뿐이라 판단하고 왔단다. ‘아...‘하는 탄식과 함께 ‘헛살진 않은 건가...’ 하는 말이 마음속에 울렸다. Edutainment의 시대, 교육공학과 영상의 접점이 절정에 오르는 시대를 그리도 갈망했건만, 새파란 꿈은 묻고 떠난 지 오랜데, 이제야 날 찾아오다니. 그러고 나서 8개월간 약속이나 한 듯이 십여 개의 큰 기업들이 똑같은 과제를 들고 똑같은 제안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지금 사다리의 제작 영상의 7할이 교육 영상이다. 재미있는, 유익한 사설 EBS가 되었달까.






인생지사 새옹지마


교육자의 삶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주 멀리 떠나 이민 와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사는 이 머나먼 곳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출발점임을 이제 깨닫는다. ‘교육하는’ 문단열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다. 그리고 40말부터 60초까지의 위기의 중년들에게 오늘의 이 말을 꼭 해 드리고 싶었다.


‘같이,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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