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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Dec 19. 2020

작별 연습

[14호]성북동의 숨은 보물 찾기 | 글 박진하

글 박진하,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편집위원



혼처도 없이 택일부터 한 꼴

소맥 파티에 전장 터로 떠나는 장정인양 전선야곡을 소리쳐 부르던

이별 끝에 입영검사에서 내려진 귀가조치로 난처해진 청춘처럼

언젠가 이루어질 작별을 오늘도 나는 또 연습한다.


북악산 오르는 계단, 짙은 어둠 속에서 두려움의 파란 불빛을 쏟아내던

들고양이가 친구처럼 느껴지는 바로 그 날이었다.

실타래처럼 길게 늘어진 북악 스카이웨이를 달려간다.

뭔가에 홀린 듯 허공에 걸려 내동댕이쳐진 물 머금은 걸레처럼

무릎은 깨지고 팔꿈치에는 붉은 통증,

깨어보니 꿈이었다.


허망한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선명하고

손꼽아 헤아려 보니 벌써 7년!

취직했다 좋아하던 큰 딸은 엄마가 되고

곱디고운 중학생 소녀, 둘째는 학사 논문을 쓰는 초보 레이디,

태권소녀 막내는 예비 고3,

모든 게 변했건만 나만 홀로!

지난 꿈이 너무나 선명해서 지금이 몽중이고

지난 세월이 현실처럼 분명하다.


서몽

아줌마들이 깔깔대며 웃는다.

서툰 내 모습을 동물원 원숭이 재주 보듯 좋아들 하신다.

그럴수록 쩔쩔매는 그 장면이 더욱 재미있다.

인생이 고달프다 그 누가 말하는가.

뒤집어 보면 이처럼 즐거운 걸,

나도 그녀들과 함께 낄낄대며 한바탕 웃어나 보련다.


취몽

아침부터 고주망태가 되어 시간도 잊고 공간감각도 상실한 채

밖으로 외치는 건 나도 그도 모를 소리뿐

정중동(靜中動)이라 멈춘 듯 한번 움직이면 태산이 무너지듯 아~ 수라장

한번 마셨다하면 입가에 묻은 탁주만 서 말은 되어야 기본,

저 대로(大路) 위에 누워 137억 년 전부터 끝없이 커져만 가는

창공을 바라보며 같이 통쾌하게 웃어볼 걸 그랬다.

그도 나도 잠시 머문 이 땅에서 우주와 하나 되는 그 순간!


길몽

그 옛날, 기름 냄새 가득한 그런 날이면

종류별로 색깔별로 큰 접시에 그득 담아

이웃들과

가까운 친지들과 나누던 그런 인정!

그 때의 다정스러움이 다시 돋아나

새로 담근 물김치 한 보시기로

또 다시 눈을 돌려 보니 커다란 새우 간장이, 없던 입맛이 새롭다.

막걸리 한잔 들이켠 진짜 환쟁이들이

고추 절임이나 빈대떡을 벽면 가득 그려내면 최고의 잔칫상,

다들 오시게! 그리고 다들 한잔씩 마시게!


먹을 것 많이 먹고 마실 것 많이 마셨으니

우리 한번 놀아나 보자, 거기 상쇠 양반,

풍물놀이 한번 해 보세 그도 이제 실컷 놀았으니

소리 한번 들어보세

그 놈의 쑥대머리 한 대목에 내 시름 얹혀 놓으니

여기가 어딘가.


뉘가 주인이고 객 이런가. 주객이 하나 되어 즐거워하던 그 순간들,

시간은 멈추고 추억은 영원히

77억분의 1과 또 다른 77억분의 1이 만나 이룬 기이한 공간

태초의 음양이 서로 끌어안고 엉클어져 천지가 창조되듯

우린 그렇게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고 있었다.


상몽

임신한 청춘 한 쌍이 국밥 한 그릇, 처자의 말씨를 보아하니 동남아 여인,

하나를 둘로 나눠 다른 것보다 가득 담아 내민 국밥 두 그릇!

그들 부부와 어머니가 함께 오신 그날은 축복의 날이었다.


그 마음씨 그대로

이른 아침 새벽시장에서 찾아온 신선함을 썰고 삶고 볶고 무쳐낸 그 음식들

드실 때마다 감탄하며 맛있다고 격려해주시던 그분들!


이 땅에서 키워내고 자란 생명이

몸 속 깊이 간직된 또 다른 생명을 만나는 그 감동의 순간!

그런 만남으로 삶의 활력과 에너지가 창조된다.

그런 활력이 넘쳐나는 그런 세상에서 기쁨의 환희를 온 몸으로 느껴가며

깨끼춤을 춰봅시다. 제자리깨끼를 시작으로 엇 쌔기로 나아가다 신이

나면 우리 다함께 장삼을 휘두르며 노랑깨끼 춤이나 춰봅시다.


파몽

우리 예법에 이별하는 법이 있으니

호돈(好遯)과 가돈(嘉遯) 그리고 비돈(肥遯)이다.

떠날 때 아쉬워말고 떠남을 기꺼이 하며

좀 더 이별이 아름다워 질 수 있게 함이 옳은 작별법이니

벼나 과일이 익으면 추수를 해야 하듯

때가 되면 모든 게 떠나야 하듯

자연스럽게 떠나는 게 최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또 다른 작별 연습을 한다.


혹 어느 시점, 문득 디미방 앞에서!

지난 시간만 있고 지금은 사라진 그 공간을 만나거든

물거품의 흔적을 찾기보단 그저 흘러간 세월을 깨끗이 지워버리시고

새로운 사랑을 가꾸어 가시길!


넌 끝났니? 난 아니야

아직 가방 끈이 둘이야!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창간호가 만들어지던 2013년 8월에 성북동에서 디미방(知味房)이란 상호의 국밥집으로 시작했습니다. 2017년 8월에 동소문동으로 옮겨 고등어구이 등을 메뉴로 하는 조그마한 한식당으로 계속 운영하다 만 6년이 되는 시점에서(2019년 8월) 영업종료를 선언했으나 성립요건이 확정되지 아니해서 그 조건의 성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후원해주시고 사랑해 주신 여러분에게 조금은 이른 감이 있지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14호가 발간된 이듬 해인 2020년 1월, 성북동디미방은 문을 닫았습니다.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4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9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9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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