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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Jan 21. 2021

성북동과 함께 자라기

[14호]주민 기고 | 글 정귀자

글 정귀자

사진 17717 김선문



함께

그리 흔한 가족사는 아닐 듯하다. 나는 신혼집을 성북동에서 시작했고, 두 아들을 낳고 길러냈다. 그 아들 둘은 모두 덕수 유치원, 성북초등학교, 홍익사대부속중·고등학교, 그리고 성북구에 있는 대학까지 졸업했다. 한 번도 성북동을 떠난 적이 없다. ‘길러냈다.’라는 표현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았을 일이겠지만, 나한테만 ‘더’ 라는 강한 느낌을 주고 싶은 거다. 유독 애썼다는 의미다. 우리 집은 엄청 높았고 작은 체구의 나는 태생부터 크게 출생한 두 아들을 유모차/유아차 없이 안고, 업고 키웠다. 성북동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모두 다 그야말로 ‘더’이다. 외출 중에 아이가 잠이 들었거나 도저히 혼자 언덕을 오를 감당이 안 될 경우에는 대학로에서 “더블이요”하고 외쳐 택시를 이용한 적도 있었다. 택시 기사님 들은 높은 도로를 오르면서 가끔 화도 내시기도, 혹은 크게 껄껄껄 웃으시는 경우도 있었다. 차를 돌려 다시 내려가기가 불편한 지역이라 난 항상 그 차가 잘 내려가는지를 끝까지 쳐다보고 90도 인사를 차 뒤통수에 대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이 걷기 시작한 이후로 우리는 힘들면 그냥 아무 집 대문 앞에서 쉬었다. 재촉하지 않고 할 수 있을 만큼 조금씩 같이 걸어서 올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행동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이런저런 모두의 경우에도 적용했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하기 싫다고 하면 그만하라 하고, 그렇게 쉬엄쉬엄 한 발자국씩 키도 크고 마음도 자랐다.


성북동은 문화시설이 풍부한 이웃을 가진 성북구의 시작이자 끝

놀이터는 멀었지만 택시도 올라오기 싫어하는 곳이라서 골목은 늘 안전했다. 아이들의 놀이터는 골목이었고 85번(지금2112) 우리 동네 자가용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만 가면 그 당시에는 창경궁 정문 앞에서 내리는 노선 이어서 창경궁은 그저 우리 집에서 좀 멀게 내려다보이는 공원! 아이가 밥을 잘 안 먹으면 참기름과 간장에 밥을 비벼 김에 둘둘 말고 있는 반찬을 담아 공원에 데리고 가면 어린 것이 들숨을 마시면서 좋아라 뛰어놀다 그 성의 없는 밥을 참! 잘도 먹어줬었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대학로라서 수많은 공연 포스터와 연극도 보면서 자랄 수 있었다. 유치원을 다닌 덕수교회 맞은편에는 수연산방이 있고 6년 동안 등하교를 같이한 간송미술관은 아이들이 다닌 초등학교 정문과 나란히 있다. 지금은 DDP로 옮겨 전시를 해서 많이 아쉬운 그야말로 성북동의 자랑이다. 해마다 5월, 10월이면 김홍도와 신윤복을 만나고 미인도를 보면서 자랐다.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은 성장기 어린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산 교육장이다.

도서관도 없었지만 버스를 타고 인사동을 지나서 광화문을 보다가 바로 내리면 사직공원 안에 있는 ‘어린이도서관’을 많이 이용을 했는데 2004년에 아리랑 도서관이 개관하였을 때 큰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었다. 성북구가 발전하는 느낌이랄까 어찌나 좋던지. 아이들은 잘 자랐다. 살면서 왜 어려움이 없었을까 똘똘 뭉쳐 잘 이겨내고 어른들도 단단히 성장했다. 세상이 온통 빠르게 바뀌고 옛 모습들을 찾기가 어려운 시절이지만 그래도 성북동은 잘 버티어 내고 있어 고맙다.


간송미술관, 성북초등학교 정문

성북동의 기억

가끔 일요일 아침 나폴레옹 제과점 빵이 먹고 싶어진다. 연말이면 덕수교회 야외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고 싶고 지나다가 한일문구점 아저씨가 잘 계신지 들여다보게 된다. 초파일이면 법정스님께서 점등식을 알리던 길상사의 연등도 보고 싶다. 수연산방의 특별히 좋아하는 자리는 지금도 누가 앉아서 우리들이 했던 것처럼 추억을 쌓고 있을 거다. 기사아저씨들이 많이 즐겨 찾으시는 쌍다리 돼지불백집. 큰애가 군대있을 때 포장해서 사다 먹인 왕돈까스. 수요미식회도 나왔다 해서 깜짝 놀랐다. 동네 음식이라고 우리가 몰라 본거다. 뭐든 가까이 있을 때는 잘 모르는 법인 것 같다. 옛날중국집은 주인이 바뀌었다. 세월이 이만큼 흘렀으니 힘들어 못하시는 건지? 주인장은 바뀌었지만 이름은 그대로인 반도이발관. 동네 아주머니들의 참새 방앗간이었던 백옥세탁소. 동아철물점. 한농정육점. 완보전자 아저씨도 매번 인사를 나눈다.

온 동네 아이들은 다 거쳐 간 리나 피아노 선생님. 하단(평양만두전문) 아저씨는 여전히 주차장 없는 맛 집을 지켜내느라 고군분투 중이시다. 지하철을 타거나 내리면서 튀김집 부부를 보고 옥수수 아주머니는 겨울에는 풀빵으로 만난다. 떡볶이 할머니는 정말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서 떡볶이를 하셨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지인이다. 도대체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서로 얼굴을 알아서 눈인사를 나누거나 덕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기억할 것도 많고 한참을 안 먹으면 궁금해서 먹고 싶어지는 음식.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사람도 생긴 성북동은 내 고향이자 우리들의 추억이다. 내 삶의 대부분의 기억들이 여기에 제일 많다.


세월과 반대로 사는 느린 사람들

내 고향 성북동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 존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건강하고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좋겠다. 길상사에서 성가정입양원에서 성당 혹은 교회나 학교 부녀회에서 오래도록 봉사 하시는 분들, 지역을 위해 보이지 않게 애쓰시는 성북동 친구들은 ‘이사를 가서 얼마를 벌었다’는 대화가 사실 어려운 동네다. 세상은 아주 빠르게 변하지만 그와는 반대로인 사람들이다. 요즘 돌아가는 세상 이치로 따지면 바보들이지만 난 느리고 안정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 그나마 세상의 속도가 맞춰지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요즘 빌라들이 쭉쭉 생기면서 모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예전에는 지나가는 차들이 다 아는 사람들이여서 서로 태워다 주는 동네였지만 지금은 아는 척하기가 쑥스럽다고 해야 할지 좀 어색한 동네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지만 당연한 일이다. 성북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아이들이 서른 살이 넘었으니 아주 긴 시간이 지나 간 거다. 교실 안의 아이들은 그때 각각의 일에 경쟁자였겠지만 지금은 모두들 건강하고 잘살아 내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30년 이상을 함께 지켜 봐왔기에 그건 친족 이상의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지 싶다. 마치 가족처럼.


동구여중, 동구마케팅고 정류장 뒤편 벽화

 꿈

예전 골목에서 아리랑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던 주인의 딸은 지금 반도이발관 맞은편에서 마카롱 가게를 하는데 달지도 않고 쫄깃한 것이 아주 맛나서 소문이 자자하더니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큰아이 성북초등학교 동창 엄마들 열 한명이 모여 만든 모임이 있는데 성북동 오래산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이름이 ‘성오모’이다. 정작 아이들은 무덤덤한데 어른들은 지금껏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그중 한 명의 딸은 시집을 가서 성북동에 살고 있고 곧 아이를 낳을 예정이라고 들었다.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그 다음 세대의 행복한 웃음까지 우리 동네를 채우기 시작한 거다. 춘천으로 파주로 이사를 가서 사는 성북동의 오래된 친구들도 있는데 성북동에 있는 두 명의 친구들은 이사 간 친구들과 영상으로 그 딸에 딸의 행복한 영상을 본다. 아이들이 군대를 갔을 때도 있었고 지금은 미국, 일본, 멀리 독일에도 가 있지만 성북동의 한옥에 모여 있는 마음으로 서로를 응원하고 사랑한다. 성북동에서 나누었던 아름다운 추억들의 긴 시간이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폴레옹 밖에 없던 지역에 소문난 빵집도 여럿이고 예쁜 카페와 맛난 음식점에 몇 개의 소문난 잔치도 있고 예술을 전공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다른 지역 사람들이 구경을 오는 지역으로 변해가고 있다. 눈길이 저절로 가는 곳도 점점 많아지고 성곽을 따라서 걷기도 좋아졌다. 낮에도 밤에도 아름다운 우리 마을의 모습도 착하고 느린 사람들도 많이 변하지 않으면서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옛날중국집은 원 주인 분이 다시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 외 성북동의 근황은 원고 인쇄 책자에 실린 2019년 하반기와 일부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2021.1.21. 기준)



정귀자는 노후설계사 연습생이고, 하는 일은 마음 가는 대로 가끔 글도 쓰고 문화생활을 즐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신혼 때부터 32년째 살고 있는 곳이 성북동 높은 곳이라 친구들에게 ‘성북동 산장지기’라고 불린다.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4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9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9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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