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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 Sep 18. 2023

여자의 시간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연극〈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리뷰


※ 본 포스트에는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와 연극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되었던 7월. 의도치 않았지만 7월에 관람한 두 개의 극 모두 나를 2호선 시청역으로 이끌었다. 비단 공연 장소뿐만 아니라 두 작품은 꽤 많은 연결점을 지니고 있는데, 마치 〈베르나르다 알바〉를 관람하고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를 후속해 관람하는 것이 본래 기획된 시리즈물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두 작품의 공통점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단연 그들 모두 여성 인물이 주체가 되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여성 서사'라는 것이다. 이는 해당 요소를 공연을 선택하는 데에 1순위로 고려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티켓 예매 사이트에 올라오는 무수히 많은 작품 가운데 몇 없는 요소라는 점에서 매력적일 만하지 않나. 


〈베르나르다 알바〉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로, 1930년대 스페인의 한 지방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연극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는 2007년 처음 만나 단짝친구에서 연인이 되고, 결혼을 해 아이를 입양하고 부부로 살아가다 헤어지고, 마침내 2099년 재회하는 모든 과정을 그렸다. 요약으로도 확인할 수 있듯 과거에서 미래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역사를 담아냈다고 할 수 있는 두 개의 공연이었다. 이번 리뷰에서는 각 작품이 펼쳐 보인 여자의 시간, 그리고 그것들을 관람한 오늘에 대해 꼽은 키워드로 이야기해보려 한다. 






여자의 어제와 욕망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이미지 출처 국립정동극장 홈페이지


줄거리

옛날 옛적 스페인 어느 작은 마을. 두 번 결혼을 하고 다섯 명의 딸을 둔 ‘베르나르다 알바’라는 여자가 있었다. 베르나르다는 하녀 폰시아를 통해 마을에서 도는 소문을 전부 파악하고 약점을 잡아 무기 삼는 잔인한 면모가 있으며, 어머니로서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심지어는 딸들의 모든 행동과 감정까지도 통제하려 하는 억압적이고 엄격한 인물이다. 

첫 번째 남편에게서 첫째 딸 앙구스티아스를 두었고, 그를 여의고 만난 두 번째 남편 안토니오와의 사이에서 막달레나, 아멜리아, 마르띠리오, 아델라 네 명의 딸이 더 태어났다. 안토니오는 잘생긴 얼굴로 의붓딸인 앙구스티아스나 집안 하녀를 탐하는 등 소위 얼굴값 하는 남자였는데, 어느 날 그가 죽게 되어 베르나르다 알바가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 되는 것으로 극이 시작된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갈등은 바로 마을의 젊은 미남자 ‘페페 엘 로마노’로 인해 비롯된다. 첫째 앙구스티아스는 나이가 많고 몸이 약하지만 가장 많은 유산을 상속받아 페페 로마노에게 청혼을 받고 약혼 관계가 된다. 그런데 페페 로마노와 밀회를 갖고 있던 막내 아델라는 그 사실을 알고도 페페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페페를 흠모하던 넷째 마르띠리오는 페페와 육체적 관계까지 갖는 아델라를 질투하여 자꾸만 그녀를 건드리고 분위기는 점점 더 날카로워진다. 

그러던 어느 밤. 앙구스티아스에게는 만나러 올 수 없다던 페페가 아델라를 찾아오고, 아델라의 뒤를 밟은 마르띠리오에 의해 그들의 부정한 관계가 온 식구들에게 밝혀진다. 분노한 베르나르다는 말을 타고 도망치는 페페에게 총구를 겨누지만 그를 죽이지 못했고, 마르띠리오는 그가 죽었다며 아델라가 있는 앞에서 거짓말한다. 페페가 죽었다고 생각한 아델라는 절망하다 스스로 목을 맨다. 불안한 낌새를 느낀 베르나르다와 가족들은 죽은 아델라를 발견하고, ‘아델라가 처녀로 죽었다고 알리라’는 베르나르다의 명령에 모두가 순종하며 극이 끝이 난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가장 순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준 작품이었다.


연인의 죽음으로 인한 절망과 어머니를 향한 원망을 내장처럼 토해내며 바닥을 기고 절규하는 아델라. 어린 막내딸을 등지고 벽처럼, 또는 무정한 신처럼 우뚝 선 어머니 베르나르다. 쓰러져 있던 아델라가 일어나 아이처럼 흐느끼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고, 잠시 뒤 둔탁한 소리가 극의 클라이맥스를 선언하듯 울리고, 기어이 모두가 잠긴 문을 열면, 목을 매단 아델라를 상징하는 매달린 의자가 떨어지며 자매들의 비명이 댐을 부수는 홍수처럼 객석까지 쏟아져 밀려든다. 그리고 모든 딸들을 등 뒤에 두고 맨 앞에 서서 죽은 딸을 올려다보는 베르나르다. 딸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다 울음을 억누르며 일그러지는 얼굴은 지금까지 본 모든 극의 장면 중 가장 큰 고통을 주었다. 하지만 그건 신선한 새 피를 돌게 하기 위해 살을 찢고 오래된 피를 쏟아내는 과정처럼 신성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만큼 황홀한 경험이었다. 


이 작품을 가장 단순하게 오독하는 방법은 '한 남자를 둘러싼 자매들의 치정극'으로 읽는 것이다. 하지만 아델라는 죽음의 얼굴을 통해 그게 틀렸음을 일러준다. 아델라는 '왜 죽었나'. 또는 '무엇이 (아델라를) 죽음에 이르게 했나'. 심란하고 위태로웠던 마음에 카운터펀치를 날린 것은 물론 페페의 죽음이나, 밧줄이 걸린 천장 아래 디딜 의자까지 그녀를 이끈 건 그게 아니다.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욕망하지만 그것 자체로 죄악이 되는 어떤 수렁과도 같은 상황이 아델라를 절망하게 한 것이다. 


일차적으로 만약 베르나르다가 다른 어머니였다면 어땠을까. 상냥하게 다독여주고, 딸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는 어머니까진 아니더라도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수중에 두려 하거나 마흔이 다 되어가는 딸을 다른 자매들 앞에서 후려쳐가며 공포로 통제하는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그랬더라면 아델라는 똑같이 페페를 사랑했을지언정 사랑에만 집착할 이유는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아가서 베르나르다가 지금과 같은 어머니였더라도 여성이 사람답게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였다면, 아델라는 '페페와의' 사랑에 목을 매거나 진짜로 목을 매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시위할 필요까진 없었을 것이다. '페페'와 '사랑'을 향한 아델라의 돌진은 일종의 갈증에서 기인했다. 계속되면 눈앞에 있는 것이 소금물이든 쇳물이든 들이키고 마는 극심한 갈증. 호수를 쳐다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여자들의 고통은 배고픔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베르나르다가 그런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었던 건 무엇 때문일까. 극 초반 안토니오의 장례식이 끝난 후 하녀 폰시아가 마을에 도는 소문을 전해주며, 남자들의 손에 올리브 숲으로 끌려간 여자가 '이 마을 출신이 아님'을 말하자 베르나르다는 불쾌해하는 듯한 반응을 한다. 리브라다라는 이웃집 여자의 딸이 미혼의 몸으로 남자와 관계를 맺어 임신했다가, 그 아이를 죽여 돌밑에 묻은 것이 들통 나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죽여 단죄하려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베르나르다와 폰시아가 다투는 장면에서 베르나르다는 폰시아의 어머니가 사창가 출신인 것을 들먹이며 그녀를 공격한다. 막달레나의 말마따나 이런 사회에서 여자로 태어난 것은 저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혼자만의 시간 자신이 안토니오의 창녀였음을 자조하는 베르나르다는 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안토니오가 앙구스티아스나 하녀에게 손을 댔을 때도 그 사실을 외면하길 택했던 순간의 나약함은 그녀를 완전히 좌절시켰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딸들이 타락을 두려워하고 욕망을 알지 못하도록 그에 대한 혐오를 가르치는 것뿐이었다. 


과거 여자의 욕망은 지금처럼 당연하지 않았다. 작품에서 그대로 인용하자면, 어제의 여자란 '식사나 잘 차려주는 멍청한' 게 미덕이었다. 사랑은 자신을 원하고 부모에게 선택된 남자를 위한 수동적인 형태가 이상적이었고, 성적인 욕망은 어떤 남자의 욕망에 응할 때만 그에게 환영받을 뿐 그 이후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그녀 혼자만의 과가 되었다. 작중에서 자신의 결혼하고 싶은, 아이를 낳고 싶은 욕망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인물이 베르나르다의 노망 난 어머니 마리아 호세파 하나인 것은 씁쓸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동시에 마냥 다르지만도 않다. 과연 지금의 여자들은 욕망하는 자신을 혐오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또 그녀들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어떻게 '여자'가 아닌 '사람'으로 길러낼 것인가. 




여자의 내일과 사랑

―연극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이미지 출처 국립정동극장 홈페이지


줄거리

친구이자 연인, 그리고 부부로 긴 시간을 함께 보냈던 재은과 윤경이 헤어진 이후 오랜만에 우주정거장에서 재회한다. 처음 만난 2007년부터 지금 2099년까지 그들 사이에는 거의 한 세기의 시간이 놓여 있고, 다시 마주한 그들은 자연히 그 길고 오래된 옛날을 회상한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프로그램 북에서 도은 작가는 처음 초고를 구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렸던 문장이 ‘아무도 죽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밝혔다. 조금 웃기게도 내가 공연이 끝난 후 좋았던 점을 떠올리며 맨 처음 생각한 것 또한 ‘아무도 죽지 않는 이야기라 좋았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여러 매체 속 퀴어 캐릭터나 커플의 결말은 유난히 쓴 것들이 많다. 퀴어 캐릭터가 사랑한 대상이 헤테로여서 이어지지 않는 것은 가장 흔한 일이고, 죽음을 맞이하는 캐릭터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실제로 1976년부터 2016년까지 미국 방송에 등장한 레즈비언 캐릭터 중 21%가, 여성 양성애자 캐릭터 중 32%가 죽임을 당했다*는 통계까지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표본을 구성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구태여 언급하는 건 잔인하겠지만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별개로 이 작품의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바로 ‘헤어짐을 보여주는 사랑이야기’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는 괴로운 일들이 대체로 많겠지만, 기쁜 순간은 찰나고 행복은 스쳐 지나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를 사랑해.”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고백을 주고받았던 재은과 윤경이 헤어지는 장면까지 보여줌으로써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는 사랑이야기라는 것을 오히려 증명해 낸다. 헤어짐은 그것이 표면적으로 잔잔하거나 격렬하거나 관계없이, 오래든 순간에든 분명 사랑했기 때문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간혹 어떤 작품에서는 정말 영원히 처음과 다르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랑을 묘사하고 연기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사람들은 끊임없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허황된 정착지를 꿈꾸지만 기실 내가 떠나온 땅도, 당도한 땅도 멀리서 보면 똑같은 황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땅의 가치에 절대적인 좋고 나쁨은 없다. 단지 어느 날, 어느 때에 내가 도착해 무엇을 뿌리고 키우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들 가운데 가장 유의미한 것은 그 사람과 현재 같이 있든 그렇지 않든, 사랑을 나눈 시간만큼 비옥해진 마음이 내 안에 남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떨어져 있어도 무언가에 연결되어 있는 기분. 네 우주복에 연결된 끈처럼, 내가 바다에 들어갈 때면 등에 매다는 장비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한 무언가가 우릴 연결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나는 그것이 영영 끊기지 않는 끈처럼, 언제나 숨 쉴 수 있게 해주는 산소통처럼 오래갔으면 좋겠어.” 재은과 윤경의 딸 재윤이 멀리 있는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관객들은 그들이 일군 땅이 얼마나 비옥해졌는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연결’이다. 재은과 윤경이 헤어진 이후에도 재윤은 그들의 딸로서 편지를 주고받는다. 결혼을 할 때, 아이를 키우면서, 불안하고 힘든 순간을 어머니들에게 의지하며 그들이 주는 양분으로 자라난다. 재은과 윤경이 재윤을 지탱하는 뿌리인 것처럼, 재윤은 재은과 윤경을 연결하는 ‘분명한 무언가’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서로 만나지 않아도 혼자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그런 사랑에 반드시 법적으로 유효한 혼인 관계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이라는 관습이나 그 관습으로 구성되는 관계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시대는 지났다. 다만 부부라는 제도적 관계로 묶이며 인생에 새로이 나타나는 무수한 선택지를 여성이 여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랑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랑은 다른 게 아닌, 사랑하는 당사자가 원하는 사랑이다. 




여자의 오늘과 고난


객석에서 일어나 극장 밖으로 나오면 눈앞에는 바로 지금 여기가 펼쳐진다. 친구, 지인, 연인과 관극을 즐긴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그날 극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이야기하고, 혼자 온 사람들은 SNS에 후기를 적어 올리고, 로비 한켠에서 판매하는 공연 프로그램북이나 MD를 사고, 귀가를 서두르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 역을 향하기도 한다. 나는 공연을 보는 동안의 꿈같은 시간만큼이나 연극이 끝난 뒤 코끝에서부터 몸의 가장 뒤에까지로 서서히 돌아오는 현실감을 좋아한다. 무대 위와 무대 밖의 괴리만큼 관객은 연극을 더 연극처럼, 현실을 더 현실처럼 체감할 수 있다. 이어 오늘과 오늘의 자신에 깊이 빠져들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볍게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좋았던 점을 꼽자면 바로 음악. 보다 적확하게 짚어내자면 '소리'였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자주 들을 수 없는 플라멩코 선율과 끝음을 한껏 올려 부르는 독특한 소절들, 아름답고 정돈된 소리부터 거기에 다소 벗어난 소리까지 여자의 모든 것을 써 주는 넘버들은 귀를 한껏 행복하게 해 주었다. 이는 단지 '넘버가 좋다'는 말 정도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는 극 중 시간의 흐름 단위가 큰 작품인데, 장면이 진행되는 배경의 연도에 히트했던 대중가요가 적절히 사용되어 몰입도를 높였다. 그중 가수 엄정화의 엔딩크레딧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음악으로, '행복한데 불행한, 신나는데 슬픈' 감정을 단숨에 관객의 마음에 심어준다. 


지금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창문에 못질한 듯 숨죽이고 8년상을 치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자끼리의 결혼이 법제화되어 이성 부부와 같은 지위를 가질 수도 없다. 말하자면 과도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와 연극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를 관람하며 빠져들어 생각할 만한 거리는 아무래도 여성의 역사가 나아가야 할 향방일 것이다. 이는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향방과 같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건, 돌아갈 수 있는 과거는 없다는 것이다. 


오늘 여자의 가장 큰 고난은 배고픔이 아닌, 선택지가 적다는 것이다. 여자에게는 여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가 필요하다. 이제 성공해서 윤택한 삶을 보여주는 여성 롤모델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나는 실패했어도 돈키호테처럼 낭만화된 모델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학로에 '여성 서사' 극이 더 많이 올라오기를 기대하는 이유이다. 미디어와 콘텐츠는 삶을 그리는 가장 넓은 도화지다. 성공하는 여자. 실패하는 여자. 여자를 증오하는 여자. 여자를 시기하는 여자.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 여자를 벗어나는 여자. 앞으로는 더더욱 많은 여자들이 각양각색으로 그려지길 바란다. 세상에는 여자를 필요로 하는 여자가 아주 많으니까. 





*박주연, “레즈비언 캐릭터 좀 그만 죽여라!” 외친 팬들 - 변화를 이끄는 퀴어여성들의 팬덤, <클렉사콘>에 가다 上 (https://www.ildaro.com/8463) 참조


《미마의 밤》 첫 번째 포스트에서 예고한 '이번 주 안'은 벗어나고 말았지만 양해를 구한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잠들기 전까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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