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러짐의 맛
무 맛을 아는가?
사실 최근에는 혀끝에 쨍~한 화려한 맛에 익숙해져서 더더욱 무는 무슨 맛인지 빠르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단지 생으로 먹을 때는 쌉싸름한 시원한 느낌,
볶음 나물일 때는 살짝 구수한 느낌,
그리고 조림이나 국에서는 부드럽고 달큼한 느낌
무라는 것이 참 신기한 게 겉으로는 별 맛이 없는 듯 하지만 실은 그 안에 깊은 맛이 숨어 있다.
볶았을 때, 무쳤을 때, 끓였을 때 상황에 따라 다른 맛을 낼 줄 알고, 주변과 잘 조회되면서 풍미를 더해주는...
결코 도드라지지 않지만
자신만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면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무.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마치 때로는 몸도 마음도 뭉그러져서 형채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된듯한 느낌이 든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강렬하고, 필요는 절실하고, 잠깐의 조용함조차 너무 짧다.
샤워를 하고 바디로션을 바를 여유조차 사치스러운 일상.
그렇게 나는 육아를 하며 철저하게 내 욕구와 취향을 무시하며 무채색이 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예상대로 현타가 왔고, 잃어버린 내가 그리웠다.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선명하게 나를 드러내며 살았던 혼자만의 삶을 추억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상으로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이 조그마한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고, 무채색의 나의 삶을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엔 생각보다 아이는 천천히 자란다. (남들 눈엔 빠르겠지만...)
그렇게 대충 포기하고 받아들이던 어느 날 아이가 나를 보며 웃는다. 그런데 그 웃음이 낯설지 않다. '저건 내 미소인데' 아이는 마치 내 표정을 복사한 듯 닮아 있었다. 나랑 비슷하게 생긴 누군가가 내 웃음을 웃는 것을 보는 것은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내가 사라지고 있다'라 하던 시간 동안 나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행동들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남겨지고 있었다니, 이건 내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나를 가꾸고 향유했던 만족감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여전히 나는 육아가 버겁고 때로는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하다. 그러나 한계에 봉착할 때마다 아이는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차원 높은 묵직한 의미를 발견하게 해 준다.
요즘 같이 빠른 시간 안에 나를 보여줘야 하고, 내 목소리를 높여야 존재감이 있을 것 같은 도드라짐의 세상에 무의 맛은 은근하고 부드럽지만, 깊고 풍성하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무 같은 존재였음 한다.
아이의 삶에 언제나 함께 함이 어색하지 않고 편안하고 부드러운 엄마로 말이다.
오늘은 뾰족뾰족한 사람들의 말과 신경 쓰이는 이런저런 일들로 피로감이 높은 하루였다.
그래서일까 퇴근하면 시원한 무가 들어간 어묵탕을 뜨끈하게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