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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프레소 Apr 23. 2023

킬러 길복순과 ESG경영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 리뷰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길복순’(2023)은 완벽하게 기업화한 폭력 조직을 그린다. 많은 액션 영화에서 기업화한 조직 폭력배 집단을 그리지만, ‘길복순’은 보다 직접적으로 한국 대기업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특히 인상적인 건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갑질, 기업 안에서의 인사고과 차이로 인한 박탈감 등을 주요 갈등 요소로 삽입하는 부분이다. 업계 넘버원으로 꼽히는 A급 킬러 길복순(전도연)에게 후배인 한희성(구교환)이 느끼는 복잡한 심경도 그중 하나다. 두 사람은 이따금 잠자리를 함께할 정도로 친밀하지만, 인사고과에서 C등급을 받는 한희성은 관계에서 묘한 껄끄러움을 느낀다.

길복순은 청부살인 업계 최고봉으로 꼽히는 킬러다. /사진 제공=넷플릭스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불평등하게 작용하는 ‘ESG’


영화에서 두 사람이 다니는 대기업 이름은 MK엔터다. 창업자인 차민규 대표의 이니셜에서 따왔다. 이벤트 회사라고 설명하는 걸 보면 엔터(ENT.)는 엔터테인먼트의 약어로 보인다. 실제 하는 일은 청부 살인이다.

MK엔터 차민규 대표(왼쪽)와 차민희 이사. 두 사람은 업계 최고 회사를 이끈다는 데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사진 제공=넷플릭스

엔터 회사라는 수식어를 임직원들은 완전히 거짓말로 여기진 않는 것 같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 무대를 꾸며 리허설하고, 본인들의 살인 사건이 TV 뉴스 주요 꼭지를 장식하면 자축한다는 점에서 청부 살해를 엔터테이닝(entertaining)하게 만든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MK엔터는 청부살인을 엔터테이닝하게 만들었다. 길복순의 과거 살인 ‘작품’을 커버하는 현장에 본인이 등장하자 후배들이 환호하고 있다. /사진 제공=넷플릭스

변성현 감독은 대기업화한 청부살인 조직이라는 콘셉트에 매료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대기업이란 존재가 사회적으로, 산업적으로 어떤 영향력과 무게감을 가지는지를 MK엔터를 통해 표현한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얼마나 다른 부담으로 작용하는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대목이 있다.


MK엔터가 침체해 가는 업계 전체를 살리기 위해 내세운 조건이 그렇다. MK엔터는 ‘미성년자는 죽이지 않을 것’ ‘회사가 허가한 작품(살인)만 할 것’ ‘회사에서 허가한 작품은 반드시 트라이(시도)할 것’이라는 3가지 조건을 내세운다. 여기서 ‘회사’란 특정 회사를 의미했다기보다는 일종의 청부살인업 협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업계 동료들에게 길복순은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다. /사진 제공=넷플릭스

이런 룰을 통해 MK엔터는 청부 살인에도 일종의 도덕이 있다는 점을 고객들에게 인지시키면서 전체 업계를 살리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패륜적이거나 저가로 발주된 청부살해도 마다하지 않던 소형 업체들은 고사하게 된다. 간신히 살아남긴 했지만 낮은 매출에 허덕이는 중소 청부살인 업체들은 MK엔터를 원망한다. 이미 대기업인 MK엔터 입장에서는 일종의 ‘윤리 경영’을 해도 별 타격이 없지만, 중소기업으로선 대기업으로 커나갈 발판을 좀체 마련할 수 없단 것이다.

전체 청부살인 기업이 모여 회의하는 자리에서 MK엔터의 차민규 차민희가 갖는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사진 제공=넷플릭스

중소기업 대표들은 뒤에선 MK엔터를 욕하지만, 회의장에선 내색하지 않는다. 괜히 업계 1위 업체에 찍혔다가 불이익을 받을 게 두려워서다. 중소기업 직원들은 업계의 양극화를 불러온 부조리를 비판하면서도, 혹시 이직 기회가 생기진 않을까 희망을 품는다.


대기업 저평가 사원, 회사 규정 외 업무 수임


길복순과 한희성의 관계를 통해서는 같은 대기업 안에서도 인사고과에 따라 삶의 조건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희성은 능력으로만 보면 A급 인재임에도 C급 인재로 분류된다. 직장과 업계에서의 평판을 수직 상승시킬 수 있는 글로벌 업무 대신 지방의 사건만 담당한다. 이 와중에 아버지는 중병에 시달려 임금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병원비를 내야 하는 형편이다.

한희성이 길복순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복합적이다. /사진 제공=넷플릭스

길복순과 한희성은 단순한 회사 선후배 사이 이상이다. 두 사람은 가끔 잠자리를 가지며 커리어와 집안 문제 등에 대한 고민을 서로 털어놓는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진 후 복순이 희성에게 아버지 병원비로 쓰라며 돈다발을 내민다. 희성은 “하기 전에 주지. 느낌 이상하게”라며 익살스러운 투로 불평한다. 마치 화대 같아서 기분 나쁘다는 투정이다. 희성이 그 돈을 거절하는 건 파트너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려는 차원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그는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회사에서 허락하지 않은 청부살인을 몰래 하고 있었던 것이다.

MK엔터에서 길복순은 단순 A급 인재 이상이다. 고난도 사건을 깔끔하게 처리하며 MK엔터의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 회사는 그녀와 재계약하고 싶어 안달이다. /사진 제공=넷플릭스

사랑하는 선배, 제거하면 내가 회사 최고 인재


미묘한 긴장감 속에서도 동반자 관계를 이어가던 두 사람은 돌연 갈라서게 된다. 복순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청부살인 미션 하나를 거부하면서다. 복순이 이를 계기로 회사 내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희성은 해당 미션을 도맡아 처리한다. 복순은 희성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희성은 복순을 제거하라는 조직 이사의 명령까지 받들려고 한다. 희성뿐 아니라 복순이 의지하던 타 회사 동료 모두가 그녀를 죽이려 든다. 성공하면 MK엔터에 취직할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길복순은 바쁘다. 청부살인도 해야 하고, 장 봐서 요리도 해야 하고, 학부모 모임에도 나가야 한다. 그녀는 이 모든 일을 능숙하게 해낸다. /사진 제공=넷플릭스

사실 희성이 복순을 배반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조직에 자신의 부정행위를 들킨 것이다. 미허가 청부살인을 수행했다는 점이 발각된 그는 궁지에 몰렸다. 회사에 의해 죽임을 당할지 복순을 죽일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자신이 죽으면 병든 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없기에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기회에 조직 내 최고 인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야망을 품었을지 모른다. 조직 실세 차민희 이사(이솜)에게서 그는 “실력은 있는데 못 크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누구에게 줄을 서야 할지 판단을 못 한다는 지적이다. 희성은 차민희 이사에게 줄을 서서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 보겠다고 결심한다.

차민희 이사는 회사의 길복순 의존도를 떨어뜨리고자 한다. 한희성의 약점을 잡아 길복순을 제거하려는 이유다. /사진 제공=넷플릭스

대기업 대표가 말했다 ... “제가 규칙입니다”


사실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기업 생태계 문제는 선악을 똑 떨어지게 판단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업계의 규칙을 만드는 이슈가 그렇다. 이를테면, 현실 세계에서 ESG경영이 시작된 건 지구가 절멸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전 세계 기업이 다 같이 책임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는 세상이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단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MK엔터가 청부 살인의 룰을 세운 논리에도 업계 존폐 위기가 놓여 있다.


하지만 대기업은 훨씬 적은 비용을 들이고도 업계 룰을 지킬 수 있는 반면, 중소기업 입장에선 규칙을 지켜야 하는 상황 자체가 위기다. 강자에게 더 유리한 방향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인 것이다. 영화 초반에 한희성은 자문자답하며 이 부분을 지적한다. “왜 세상 규칙이라는 건 힘 있는 사람들이 만들까요. 정답. 힘 있는 사람들을 더 힘 있게 만들어 주니깐.”

업계 전체 회의에서 차민규 MK엔터 대표는 청부살인 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강조한다. 회의라곤 하지만 실질적으론 차 대표의 방침을 통보하는 자리다. /사진 제공=넷플릭스

현실에서 그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환경, 사회적 책임, 지배구조를 무시하고 성장해 온 대기업이 이제 와서 여타 중소기업의 미흡한 ESG경영을 비판해도 되는 것일까. 돈 되는 건 뭐든 착취하며 선진국이 된 나라들이 아마존 개발을 허용하는 남미 국가를 비난할 수 있는가. 결국 한 생태계에서 룰이 만들어지는 시점은 해당 생태계 강자들이 이를 충분히 지킬 수 있을 때가 아닌가. 어떤 룰은 대기업, 중소기업의 양극화를 더 키울 뿐이다.

중소기업 대표인 신 상사가 MK엔터를 지적한다. “우리 차민규 대표님께서도 같이 규칙을 어기신 건 아닌가. 이런 합리적인 의심이 듭니다.” /사진 제공=넷플릭스

영화 말미엔 한 중소 업체 대표가 ‘당신들도 규칙을 어겼다는 의심이 든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대해 MK

엔터 차민규 대표가 하는 말은 마치 대기업과 선진국이 자신들에 대한 비판에 답하는 것 같다. “다들 오해를 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 저는 규칙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제가 규칙이니까요.”

“저는 규칙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제가 규칙이니까요.” /사진 제공=넷플릭스

꺾일 걸 알면서도 부딪치는 마음


이처럼 ‘길복순’은 기업 생태계 문제, 기업 내 인사 평가에 따른 직원 간 갈등, 능력주의의 명암 등에 관해 물음을 던진다. 이 모든 주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 강자의 편의를 위해 설계된 불합리한 세상, 내가 정정당당하게 겨뤄도 누군가 반칙을 하는 이곳에서 개인이 윤리를 고민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이젠 자신의 질문에 답변할 차례다. 영화는 다소 낭만적인 태도로 돌파한다.

자기 생존을 위해 사랑하는 이에게 칼을 들이대는 한희성과, 위험에 처할 줄 알면서도 소중한 이들을 지키려는 길복순은 차이가 있다. /사진 제공=넷플릭스

홍콩 느와르스러운 낭만주의가 느껴진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길복순의 딸이 엄마에게 초반부에 건네는 말을 들어보자. “내가 엄마면 세상이 불공정하다고 가르치기보다는 정당하게 경쟁하는 법을 가르칠 거야.”


여기엔 불공정한 시스템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또는 혼자서 정당하게 경쟁하다가 졌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답변은 없다. 그저 정당하게 경쟁한 것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다.

함께 TV를 보던 도중 딸이 건넨 말은 길복순 마음의 어떤 지점을 건드린다. 킬러로 살며 처음으로 정당한 경쟁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사진 제공=넷플릭스

다시 말해, 다 같은 킬러라도 길복순과 한희성의 윤리엔 차이가 있다. 한희성이 거대 조직 논리에 순응하며 사랑하는 사람까지 제거하려 드는 반면, 길복순은 조직에 짓뭉개질 위험을 감수하며 조금이라도 윤리적인 선택을 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꺾일 걸 알면서도 부딪치는 마음이다.


‘길복순’은 감각적인 느와르 액션물이다. 몇몇 장면에서 대사가 다소 설명적인 인상을 주지만, 전도연 설경구 구교환을 비롯한 명배우의 연기력으로 자연스럽게 덮는다. 청부살인, 장 보기, 학부모 모임 참석, 딸 고민 들어주기로 이어지는 바쁜 길복순의 일상을 따라가는 동안 관객 또한 양극화한 현대 기업의 권력 문제,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적 시각 등 사회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길복순’ 포스터. /사진 제공=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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