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씨네프레소 May 18. 2023

소중한 것을 전할 땐 가공의 과정이 필요하다

영화 <우아한 세계> 리뷰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어느 날, 조직폭력배 강인구(송강호)는 딸 희순(김소은)의 학교를 방문해 담임 교사와 면담한다. 인구는 희순의 성적 하락과 잦은 결석에 대해 말하는 담임을 화장실로 불러 봉투를 건넨다. 돈 봉투였겠거니 생각한 관객의 예상은 얼마 뒤 깨진다.


담임이 책과 함께 돌려보낸 봉투엔 ‘황실룸쌀롱 200만원’ 상품권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희순은 “아빠 때문에 죽고 싶다”고 하지만, 인구는 자신의 행위를 탓하는 아내와 딸을 야속하게 느낀다. 인구의 입장에선 딸을 잘 봐주길 바라며 진심으로 건넨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인구가 딸의 담임을 만나러 가기 전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다.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우아한 세계’(2007) 초반부에 나오는 이 에피소드는 영화 전개 방향에 대해 많은 걸 암시한다. 단순히 ‘조폭 아버지’라는 설정을 보여주기 위해 삽입한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 작품에서 인구는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을 전하기 위해선 진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말이다.

인구는 딸 담임에게 유흥업소 상품권을 건넨다. 딸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수치스러워한다.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조직폭력배


줄거리를 살펴보자. 영화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조직폭력배 인구의 이야기다. 인구는 성실한 직원이지만 직장에서의 삶이 만족스럽지만은 않다. 능력을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회장의 친동생인 노 상무(윤제문)가 그의 행동에 딴지를 걸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구는 자신을 노 상무보다 더 아끼는 회장을 보며 충성을 다짐한다. 다른 조직의 친구 현수(오달수)가 노 회장 욕을 하면 버럭 화를 낼 정도다.

노 상무는 인구에게 자주 시비를 건다. 회장이 친동생인 자신보다 인구를 더 아끼는 것 같은 인상에 질투심이 생긴 것도 있다.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집에선 요즘 딸과 자주 마찰을 빚는다. 아직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머리를 감다가 물이 끊기곤 하는 주거 환경만 바꿔줘도 딸이 훨씬 안정감을 느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일하며 거대한 이권이 달린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시킨다. 곧장 고급 빌라 단지의 마당 딸린 단독 주택을 계약한 그는 드디어 꿈꾸던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딸이 좋아하는 고기만두를 사서 집에 돌아가는 인구의 얼굴엔 조폭 같지 않은 ‘천진한’ 웃음이 번진다.

집에선 자주 물이 끊긴다. 인구는 집안의 열악한 조건만 개선해 줘도 딸이 조금 더 안정감을 느끼리라 기대한다.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딸의 일기에 적혀 있었다 “다른 조폭들은 칼 맞고 잘만 죽던데”


그러나 집엔 그를 반기는 가족이 없었다. 딸은 아빠가 사 온 고기만두를 쳐다보지도 않고 친구를 만나러 가버린다. 적적해하던 그는 사진첩을 뒤지다가 딸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며 옛날을 그리워한다. 그러다 딸의 일기에 손을 대고 딸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언제까지 저렇게 살 생각인지 모르겠다. 칼이나 맞아 버리지. 다른 조폭들은 칼 맞고 픽픽 잘만 죽던데.’

딸은 아빠가 사 온 고기만두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인구는 억울했다. 폭력배 생활이 재밌어서 계속했던 게 아니다. 그저 아내와 아들, 딸에게 울타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딸이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 심지어 죽기를 바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슬픈 마음에 만취한 인구는 집에 돌아온 딸에게 칼을 내밀고, 자신을 찔러달라고 한다. 그런 추태를 부리다 경찰서에 끌려가며 딸에게 또 한 번 부끄러운 경험을 하게 한다.

‘우아한 세계’는 ‘관상’으로 유명한 한재림 감독의 작품이다.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식구들이 모두 행복한 그곳엔, 아버지만 없었다


영화는 사랑을 전달하는 데는 진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인구는 늘 딸 사진을 품고 다니는 ‘딸 바보’이지만, 자신의 ‘진심’을 어떻게 전할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인물이다. 자기 마음은 애정으로 가득한데 그걸 몰라주는 딸과 아내가 매정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불순물이 다량 섞인 원석을 내밀며 프러포즈하지 않듯, 우리가 소중한 것을 전할 땐 늘 가공의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속 깊이 있는 진심이라는 것도 원석에 가깝다. 그것을 아름답게 전달하기 위해선 ‘남들도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세공해야 한다. 인구는 그걸 계속해서 외면하며 억울하다고만 하니 식구들과 가까워질 수 없다.

인구가 사는 세계는 전혀 우아하지 않다. 딸이 원했던 건 화려한 집과 차가 아닌 최소한의 품위였다.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인구에게 가족들은 한 번 더 갱생의 기회를 준다. 조직에선 퇴직금을 받고 물러나서, 범죄자가 아닌 신분으로 가정을 챙길 수 있는 기회다. 인구로선 새 삶을 개척해야 하는 일이니 당분간 가족 모두 고생하겠지만, 식구들은 가장이 자기들을 위해 결단을 내려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인구는 천직인 조폭을 그만두면 아이들에게 최상의 교육을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껴 친구의 조직에 새로 취직한다. 끝없이 어둠의 세계로 회귀하는 인구의 삶을 견딜 수 없었던 식구들은 해외로 유학 이민을 가버린다.

꿈꾸던 멋진 집을 가졌지만, 그곳엔 인구 혼자 남아 있다. 그는 행복한 가족들의 모습을 비디오로 보며 혼자 묻는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식구들이 해외 생활 도중 보내온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아내와 자녀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행복이 가득한 현장엔 인구만 없다. 인구는 혼자 비디오를 보다가 울면서 묻는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잘못한 게 있을 것이다. ‘진심만 있다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사랑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 일방적 태도다.

‘우아한 세계’ 포스터.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이전 03화 내겐 살아갈 이유인 가족, 누군가에겐 죽고픈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