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택시 드라이버’ 리뷰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내면이 호수처럼 잠잠한 상태를 구원이라고 한다면, 대부분 영화는 구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주인공은 마음속에 있는 불편감을 해소하기 위해 더 많은 재력을 추구하거나, 이성에게 구애하거나, 원수에게 복수하려 한다. 이들은 목표가 달성됐을 때, 구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계속해서 달려간다.
구원을 찾아가는 서사로서 마틴 스코세이지 ‘택시 드라이버’(1976)는 다소 어려운 접근법을 택한다. 주인공은 대부분 극영화 중심인물과 마찬가지로 번뇌를 지니고 살아가는 인물이지만, 자기 내면이 왜 시끄러운지를 모른다. 스스로도 원인을 모르는 괴로움 갖고 달리는 주인공은 평온을 찾게 수 있을까.
소돔과 고모라 같은 뉴욕 거리, 그 위를 달리는 택시 기사
줄거리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미국 해병대 출신인 트래비스 버클(로버트 드 니로)은 잠 못 드는 밤에 시달리다 택시 기사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밤중에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뉴욕을 배회할 바에야 직업으로 택시를 모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12시간을 일하지만, 불면증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주인공 로버트 드니로는 오랜 기간 감독의 페르소나였다. / 사진 제공=컬럼비아픽처스트래비스는 뉴욕은 쓰레기가 사는 동네라고 생각한다. 택시를 타며 만나는 여러 손님과 목격하는 거리의 추태는 그의 인간 혐오를 키운다. 그의 택시에 타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승객도 있다. 아마도 매매춘을 위해 숙소로 향하는 중이었을 그들은 거리낌이 없다. 트래비스를 인간이 아닌 배경쯤으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빈민가를 지날 때면 그는 차를 향해 물건을 집어던지는 불량배들의 테러를 각오해야 한다.
이제 막 시작한 사이인데, 포르노 영화관 데려간 남자
어느 날, 트래비스는 유력 대선 후보의 선거 캠프에서 일하는 벳시(시빌 셰퍼드)에게 마음을 뺏긴다. 벳시는 트래비스의 데이트 제안에 순순히 응하는데, 아마 인텔리 사회 특유의 점잖은, 혹은 가식적인 분위기에 질린 것처럼 보인다. 반면, 거리를 돌아다니는 트래비스는 의사 표현이 분명하고, 솔직하다. 두 사람은 쉬는 시간에 짬을 내 커피 한 잔 하는 관계에서 퇴근 후 서로에게 시간을 내주는 사이로 서서히 발전해 간다.
트래비스가 데이트를 위해 그녀를 포르노가 상영되는 극장으로 데려가기 전까지 말이다. 벳시는 그 사건 이후 트래비스의 연락을 피한다. 그가 갓 시작된 관계를 한번에 망치는 행동을 한 이유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와 잠자리를 갖기 위한 작업 차원이라도 볼 만한 근거도 뚜렷하지 않다. 외려 트래비스가 그녀를 영화관으로 인도할 때의 눈빛에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기 취미를 소개하는 남자의 순수함이 비친다.
감독이 해당 신(scene)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트래비스 또한 뉴욕이라는 ‘소돔과 고모라’를 구성하는 한 인물일 뿐이라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쓰레기라고 판단하지만, 그 역시 아직 잘 모르는 여자와 포르노를 보러 간다는 게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모를 만큼, 악에 무뎌진 상태임을 보여준 것이다.
착취당하는 아동을 모른 척했다
스스로를 구원하고 싶어 하는 트래비스에게 인생은 뜻밖의 만남을 선사한다. 그의 차에 “빨리 어디든 가달라”며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가 뛰어든 것이다. 그는 외면한다. 도와달라는 아이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음에도 곧 그녀를 따라온 성인 남자의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보호자에게서 달아나는 가출 청소년쯤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며칠 뒤 거리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성판매를 하고 있었고, 트래비스는 스스로가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았음을 자각한다.
영화는 우리가 애써 못 본 척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성인에게서 정상적인 보호를 받고 있는 미성년자는 밤중에 택시로 뛰어들며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우리는 ‘만에 하나’ 아이가 정상적인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이상 행동을 했을 확률 때문에 명백한 가능성을 외면한다. 그 결과는 거리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성매매 피해 아동과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착취하는 어른, 그리고 이 모습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도시의 무감각함이다.
악을 욕하는 우리의 발끝도 악에 젖고 있는지 모른다
트래비스는 매춘 현장을 습격해 아이를 탈출시키기로 마음먹는다. 어쩌면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된 행동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앞서 그가 유력 정치인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총에 장전된 자신의 분노를 어떻게든 발사해야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불사하고 매춘 현장을 습격한 덕에 아이는 구출된다. 정치인 암살에 성공했다면 사회에서 매장됐을 그는, 곧 영웅이 돼 주요 일간지를 장식한다. 그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인다. 그걸 구원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적어도 자신을 괴롭히던 조바심과 강박증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진 것 같다.
이 영화는 우리가 이상향으로 삼아야 할 영웅을 그리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악에 취해버린 도시에 대한 말한다. 그는 결과론적으로 영웅이 됐을 뿐, 대중은 그 앞에 과정으로 놓인 악행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그가 암살하려던 정치인 또한 우연히 지지자들의 영웅이 됐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두 사람은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약자에 대한 폭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기도 한다.
또한 이건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겨냥하는 메시지일 수 있다. 우리는 ‘평범한 시민’으로 스스로를 악인들과 구분짓지만, 약자를 향한 착취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시의 악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단 것이다. 연약한 이를 대상으로 하는 도시의 폭력이 종식되기 전까지는 도시에 살아가는 우리의 잠 못 드는 밤과 불안한 마음도 계속될지 모른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수많은 스토리텔러에게 영감을 줬다. 최근의 작품만 보더라도 린 랜지 감독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8), 토드 필립스 ‘조커’(2019) 등에 이 영화의 흔적이 엿보인다. 작품 발표 후 약 50년이 지났지만, 감독이 던지는 질문이 여전히 보는 이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매일 썩어가는 도시의 탐욕 속에 상처 입는 여린 존재들을 외면하고서는 자신을 구원할 길도 없다는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