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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의 서재 Oct 22. 2024

소주

할아버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나는 소주가 생각난다. 할아버지는 소주를 좋아하셨다. 할아버지댁 마당 한편에는 언제나 초록색 빈병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소주를 좋아하셔도 소주에 밥을 말아먹지는 못하셨다. 

내가 얼마나 어린지도 기억나지 않는 오래전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밥에 소주를 말았었다. 아마 물에 밥을 말아먹고 싶으셨는데 생수병에 담긴 소주와 헷갈리셨던 것 같다. 밥을 다시 퍼달라는 할아버지의 부탁에 할머니는, 육시럴 소주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밥은 못 말아먹네 하고 독설을 날리셨다. 무뚝뚝하고 말수 없던 할아버지는 항상 할머니와 옥신각신 다투었지만, 그때는 할아버지도 당신 실수가 그만큼 어이가 없었던지 받아치지 못하셨다. 소주의 알코올 냄새와 알알이 소주에 담긴 밥알들, 할머니의 정겨운 욕. 할아버지와 소주의 추억은 나를 웃음 짓게 만든다.

할아버지는 키가 장승같이 큰 사람이었다. 나는 언제나 키가 큰 할아버지를 올려다봐야 했다. 그런데 장승같던 할아버지가 어느 날 아이처럼 작아졌다는 걸 깨달았다. 할아버지의 노년은 그렇게 내 앞에 잘못 배달된 택배처럼 덜컥 배달되었다. 당신 딸자식 집을 청소해 준다며, 아픈 몸을 이끌고 우리 집에 온 할아버지의 등은, 더 이상 장승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작아졌다. 그렇게 컸던 사람이 이렇게 작아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할아버지는 작아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걸어오는데도 가빠진 할아버지의 숨소리는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죽음에 조금 더 가까운 사람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죽음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마치 저 멀리 제3세계 사람의 죽음이 알고 보니 내 친척의 죽음이었다는 일만큼이나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엄마 말씀 잘 들어라. 그 말이 당신의 유언이 될 거라는 걸 아셨던 걸까. 손자의 손을 잡으며 나지막이 했던 그 말. 아파서 몸도 일으키지 못하는 당신은 아픔에 눈도 뜨지 못하며 손자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리고 며칠 뒤 할아버지는 씻은 듯이 나아서 모두를 안심하게 만들고, 뭐가 그렇게 급하셨는지, 하늘나라에 무언가 두고 온 사람처럼 그렇게 황급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마지막으로 고인과 인사를 하라는 장례지도사의 말에 나는 울면서 할아버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차가움. 할아버지의 볼은 금속보다 더 싸늘하고 차가웠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영원한 차가운 잠에 들었다. 

나는 소주를 마실 때면 가끔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할아버지는 나를 웃고, 슬프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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