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만에 다녀온 부여 일기
작년 이맘때쯤 영국에서 J가 나를 보러 한국에 왔다.
멀리 영국에서 나를 위로하고 그저 만나고 싶어서 찾아온 J였지만 나는 뭔가를 많이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저녁 8시만 되면 지쳐 쓰러지기 일쑤였고 숨도 자주 가빠왔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건강하다 생각했던 몸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아직 몸도 마음도 아팠고, 쉼이 필요했다. 우린 부여에 다녀오기로 했다.
어디를 갈지는 딱히 정하지 않았다. 부여는 워낙 갈 곳이 많은 동네였다. 궁남지부터 시작해서 부소산성, 낙화암, 정림사지 오층 석탑 등등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도 많았고 물든 나무들 덕분에 그냥 걸어 다녀도 동네 여기저기가 영화 세트장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조금만 걸어도 쉼이 되는 도시를 좋아한다. 여기저기 찾아다니지 않아도 볼 것이 많고 도시의 분위기 자체만으로도 여행 온 느낌을 주는 장소가 있다. 부여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고, 더구나 내 체력이 바닥인 날이었기 때문에 우린 욕심내지 않고 가고 싶은 곳을 한두 곳만 정하기로 했다. 가장 가고 싶었던 궁남지에는 국화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백제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인공연못인 궁남지는 가을이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았고 조금은 어수선한 느낌도 있었다. 역시 아주 뜨겁긴 하겠지만 7월에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과거에는 이곳에서 뱃놀이도 했다던데, 상상이 가지 않는다. 엄청난 행사였겠지. 사진에서만큼은 이곳 궁남지가 너무 예쁘게 나와 J와 사진을 찍으며 감탄사를 냈던 기억이 난다.
가고 싶었고 기대했던 궁남지가 조금 실망스러워 다음 행선지를 한 군데 더 정하기로 했다. 정림사지 오층 석탑. 왠지 교과서에서 보았던 그 탑이 보고 싶었다. 유독 눈에 들어왔던 이름이기도 했고, 대충 다음 행선지를 정하는 건 내가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 덕에 실패할 때도 있지만 새로운 즐거움을 만날 때도 있다.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이번 선택은 아주 적당한 선택지였다.
정림사지 오층 석탑에는 정말 탑 외에는 별달리 볼거리는 없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탑 입구까지 노란 은행잎을 밟으면서 예쁜 길을 걸을 수는 있다. 입구를 통과하면 아담한 석탑이 이렇게 오뚝이 서 있다. 파란 하늘과 땅 사이에 정확한 비율로 가르는 석탑이 아름다워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가만히 서 있으면 시간이 조용히 흐르는 게 좋다.
부여에 가서 꼭 방문해보고 싶었던 카페가 있었다. 다음 방문지는 그래서 카페로 정했다. 인터넷상에서도 꽤 유명한 카페인 것 같은데 자가용을 타고 꽤 들어가야 있었던 것 같다. 카페에 도착하니 풀어놓은 닭들이 나와 J를 맞아주었다.
코타쯔에 무릎을 넣고 마주 앉아 J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내가 힘든 시간을 겪었던 그동안 J도 멀리에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했다. 주변에 알고 지내는 의사 친구들에게 내 상태를 물어봐주기도 하고 종종 연락이 오기도 해서 날 생각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많은 염려의 시간을 보냈을 줄은 몰랐다. 이야기를 하며 운건 내가 아니라 J였다. J는 내가 정말 죽을까 봐 너무 걱정했었나 보다. 사실 그건 나도 그랬다. 그때까지도 진행되던 걱정이기도 했다. 나는 농담하듯 J에게 '내가 얼마나 오래 살 것 같니?'라고 물어보기도 하였고, '내가 오래 산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모두 따뜻하고 좋은 시간이었다.
이제 나는 독일로 돌아왔고, J는 영국으로 돌아갔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이 어려워졌고 우린 그때의 시간을 때때로 회상하면서 그리워한다. 아, 그때의 쉼. 그립다.
쉬기 위해선 뭔가 대단한 게 필요하지 않은가 보다. 모든 것이 적당히 좋으면 좋겠지만. 그렇지만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다. 좋은 사람들, 조용한 시간 그리고 나 자신이 필요하다.
부여는 그런 의미에서 내게 좋은 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