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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쩌리짱 May 03. 2016

A아트빌 301호 연희작업실의 추억

1  


간밤에 굵은 빗방울이 양철 지붕을 힘차게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언제나처럼 인터넷 바다를 떠다녔다. 내가 사는 원룸은 부엌과 베란다 분리형인데, 부엌만 양철 슬레이트 지붕이라서 경쾌한 빗방울 연주를 실컷 듣고 살았다. 딱 봐도 이 부엌은 불법 개조의 냄새가 나는 공간이다. 사용자의 편의 같은 건 아랑곳없이 삼면을 큰 창문과 새시로 둘러서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 냉방과 난방도 물론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작은 공간을 아낀다. 자연과 가깝다고 할까, 은근히 낭만적인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서향 부엌이라 매일 저녁노을이 지는 풍경을 한 아름 보여주고, 비가 오는 날이면 양철 지붕 위로 '콩콩쿵쿵' 시원한 빗방울 소리가 춤을 춘다.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좋아서 방과 부엌을 가르는 새시 창을 반쯤 열어 놓곤 했다. 



알아,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지. 


이 원룸에 와서 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는 걸 마침내 깨달았다. 아름다운 노을빛과 경쾌한 빗소리를 위해선 덥고 추운 부엌을 감내해야 하는 것처럼. 출근하지 않을 자유를 손에 쥔 대가로, 출근도 없지만 퇴근도 없는 프리랜서 생활을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이것이 창의적인 직각삼각형 베란다의 위엄!




처음 내 방, A아트빌 301호를 선택한 것은 구조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부엌 분리형 원룸은 꽤 있지만 베란다까지 있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이 건물은 지은 지 15년쯤 되었다. 301호의 낡고 더러운 데다, 청소라는 행위를 한사코 거부해온 것이 분명한 청결 상태( 무려 신혼부부가 살았던 방인데! 덕분에 신혼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졌다고!)를 보고 기겁한 것은 나중 일이고, 우선은 편리한 구조에 마음이 갔다. 


원룸에 살아보면 부엌과 베란다가 따로 있다는 것이 얼마나 눈물나게 행복한 일인지 알게 된다. 


음식을 하는 동안 침대며 행거 옷장에 냄새가 밸 염려도 없지, 베란다가 있으니 좁은 방에 빨래 건조대를 놓는 불편함도 없지 그야말로 부엌 따로, 베란다 따로 만만세다. 내가 사는 301호 부엌이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지닌 것처럼, 베란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독특한 불편함을 자아냈다. 이 공간의 특징은 창의적인 건축설계사가 베란다는 당연히 직사각형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직각삼각형 베란다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직각삼각형 베란다라니! 세탁기와 보일러가 있는 왼쪽은 길쭉하고 방에서 베란다로 나가는 오른쪽은 짧다. 빨랫줄만으로는 부족해 빨래 건조대를 놓으면 내가 지나갈 틈이 없어진다. 빨래건조대의 한 끝에서 빨래를 널다가 반대쪽 끝에 빨래를 널고 싶으면, 건조대를 최대한 붙잡고 그 틈에 몸을 비집어 넣어 반대쪽으로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만만찮다. 건조대가 한쪽으로 기울거나 기껏 널은 빨래가 바닥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니 건물주 입장만 고려한 직각삼각형 베란다의 설계자는 반성하라! 반성하라! 그래도 원룸 생활자로서 볕이 잘 드는 베란다의 존재는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것이었다. 덤으로 직각삼각형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 때마다 건조대와 사투를 벌이던 소소한 추억까지 생겼다. 당장은 나빠 보이는 것도 뒤집으면 언제나 좋은 것이 숨어있다. 


 

여기가 원룸의 한 구석, 두 평도 안 되는 나의 작업실



3  


A아트빌이라는 건물 이름도 호감이 가는 대목이었다. 알고 보니 ‘아트빌’이라는 이름은 원룸텔이나 아파트에 흔하게 쓰이는 이름이었지만! 그래도 건물 이름 하나 짓는 것도 엄연한 창작인데 굳이 ‘아트’를 붙인 까닭이 있지 않을까? 직각삼각형 베란다만큼이나 아방가르드한 예술가의 감성으로 원룸들이 채워지길 바랐던 건물주의 소망이 담긴 이름이 A아트빌 아니겠는가, 제멋대로 상상한 나는 내친 김에 원룸 중문에 ‘연희 작업실’이라는 팻말을 붙여두었다. 


‘작업실’이라고 생각하니 원룸을 드나드는 마음이 다소 경건해졌다. 그 팻말을 볼 때마다, 비록 슬리퍼를 끌고 나가 컵라면에 캔맥주 하나를 사 들고 오는 참이더라도, 여기가 작업실인 이유를 떠올리곤 했다. 


작업실의 사전적 의미는 일을 하는 방이라는 뜻이다. 자고 먹고 입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방이 아니라 일을 하는 방. 전향이랄 것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면서 프리랜서가 되었고, 그러자 집은 쉼터이자 일터로 바뀌었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은 나 혼자여서 타고난 게으름과 미친 듯이, 정말 미친 듯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작업실 팻말은 그래서 달았다. 책상과 책장이 있는 두 평 남짓한 공간이 나의 일터이기도 하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이달 말이면 A아트빌 301호를 떠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년이라는 계약 기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시간은 참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자기 갈 길만 가버린다. 그동안 통장 잔고가 야금야금 줄어들어서 월세를 더 저렴한 방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하나 301호의 공간들을 곱씹어 보는 건, 일종의 정 떼기 연습이다. 잔뜩 웅크린 순간들인 것만 같았는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변화무쌍한 시간 속에서 비로소 기지개를 켜는 순간들이기도 했다. 조금은 느긋해진 내 마음을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지긋이 속삭인다.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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