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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쩌리짱 Apr 27. 2016

다시 태어나기 좋은 날

4월의 바람이 보드랍게 뺨을 스쳤다. 아무리 얼음장 같은 마음이라도 스르륵 녹을 것 같은 따스한 봄날이다. 총천연색 고운 봄 구경엔 관람료도 필요 없다. 마음껏 누려도 좋은 사치다. 연남동 경의선숲길공원 아무 벤치에나 앉아 가만히 봄을 바라보았다. 공원을 거니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 덕에 적당한 활기가 도는 저녁 6시다. 


맞은편 벤치에 앉은 젊은 엄마는 유모차 두 대 속 아기들을 요령 있게 돌보고 있다. 밝은 표정과 낭랑한 목소리로 아기들에게 살갑게 말을 붙이다가도 이내 무료한 얼굴이 되어 사람들을 쳐다본다. 거리에는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하는 다른 엄마들도 여럿이다. 저 젊은 엄마들은 내 또래일까? 아냐, 피부 탄력이며 주름 없는 눈매를 보니 나보다 훨씬 어릴 것 같은데. 그만 나는 엉엉 소리 내 울고 싶어 졌다. 안락한 유모차에 탑승한 아기처럼 ‘부모의 사정 같은 걸 내가 알게 뭐야, 어서 안아줘’라는 떳떳한 태도로 우렁차게 울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서른 중반의 여자가 동그라미를 칠 수 있는 카테고리는 모두 몇 개나 될까. 


직장인, 가정주부, 주부이면서 직장인, 주부이면서 엄마, 주부이면서 엄마이면서 직장인. 카테고리가 다섯 개나 되는데 내 몫의 동그라미는 그릴 곳이 없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는 힘차게 시간을 거슬러 다시 엄마의 보호가 그리운 철부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남들만큼은 열심히 살아온 줄 알았는데 어쩌면 남들만큼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일주일간 벼르고 벼르던 번호를 눌렀다. 익숙한 엄마의 음성이 들렸다. 



쯧쯧, 네가 뭐 하는 줄 아니? 사서 고생이야.
결혼해서 애를 키우면 일을 쉬어도 문제가 아니잖니


자원봉사단 어머니들의 소박한 그림으로 시작해 여러 솜씨장이들의 붓칠을 더해 완성된, 동네의 어여쁜 벽화

               


엄마는 무엇이든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매사에 정확한 엄마의 말을 듣는 건 좀 아픈 일이지만,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서 딱히 방어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엄마는 래퍼처럼 단 두 문장에다 요즘 내 삶의 문제들을 싹 압축하지 않았나. 어딘가 모르게 리듬감도 살아있다. 요, 사서 고생, 베이비, 결혼도 없고 일도 없고, 베이비. 엄마의 말을 길게 풀어보자면 이렇다. 서른 중반에 남편도 없는 네가 어쩌자고 안정적인 회사는 때려치우고(나름대로 사정은 있었다), 밥벌이도 안 되는 프리랜서 같은 건 왜 해가지고 월세 보증금을 까먹는 처지가 되었니. 


같이 살 때는 엄마의 잔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다. 7년 전 부모님 집을 떠나 홍대 근처로 독립을 했던 표면적인 이유는 월급이 밀리지 않을만한 회사에 입사한 것이었지만, 실은 엄마의 매서운 잔소리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한데 엄마의 단도직입적인 말투가 이처럼 재치 있고 흥겨운 노래처럼 들리는 순간이 오다니! 


누가 그랬더라? 잔소리는 엄마의 직업이라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지도 모른다. 고작해야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자신이 이랬다가도 저럴 수 있는 존재라는 것뿐이다.


연남동 어느 집에 가득 핀 봄. 화분에서도 무럭무럭 자라는 봄을 보면서, 자꾸 울컥한다


에휴, 지금 그런 말하면 뭐하겠어. 
다시 시작한다 생각해. 이 동네로 와.


그 순간에 왈칵,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가 고마웠다. 목구멍에 걸려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엄마가 먼저 해 준 거였다. 버티고 버티다 재정 파산 신고를 하는 심정으로 휘경동 부모님 부동산으로 찾아간 날이었다. 새 직장을 구해보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질 않았다. 연봉은 깎을 수 있지만 나이를 깎을 수는 없었다. 10년 차 잡지 기자 경력은 플러스가 아니고 핸디캡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전향이랄 것도 없이 프리랜서로 일하게 되었다. 


가끔 연락하던 후배가 고맙게도 연재처를 하나 소개해주었다. 1년 넘게 매주 즐겁게 원고를 썼다.(웹툰을 보고 쓰는 짧은 평이 밥이 되어 주다니!) 한데 월세를 책임져 주던 연재처가 갑자기 휴간을 한데다 연이어 일감도 줄어들고 말았다. 아이고, 정말이지 아이고, 였다. 해서 부모님 동네로 이사를 결정했다. 부모님 부동산을 통하면 중계수수료가 들지 않고, 월세를 줄인 다음 엄마로부터 먹거리를 공수받으면 생활비를 최대한 아낄 수 있어서다. 


공무원이었던 아빠는 정년을 다 채우지 않고 십 년쯤 전에 휘경동에 작은 부동산을 여셨다. 아직은 50대였던 아빠가 노량진의 공인중개사 학원을 다니면서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나는 모른다. 최근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과년한 딸이 돈이 떨어졌다고 찾아온 것에 대해 아빠는 엄마와 어떤 대화를 나눌지, 나는 모른다. 과묵한 아빠는 엄마와 내가 눈물 콧물을 쏟는 동안 신문을 보는 척하면서 헛기침을 몇 번하고 손님에게 집을 한 군데 보여주고 돌아온 다음, “저기, 밥때 됐는데 장어나 먹으러 가지” 했다. 


아빠는 내가 찾아갈 때마다 장어를 사준다. 그 동네의 광활한 장어구이 식당은 아빠처럼 주름진 얼굴의 아저씨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아빠는 별 말을 하지 않고 장어만 먹었다. 나도 장어만 먹었다. 엄마도 장어만 먹었다. 아빠는 올해 예순일곱이 되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함께 장어를 먹을 수 있을까. 장어는 비쌌다. 장어를 사주는 것은 어쩌면 아빠가 내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이 아닐까, 이 장어에는 안부인사도, 웃음도, 눈물도, 화해도 모두 담긴 게 아닐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아빠가 장어를 무지 좋아한다고만 여겼다. 




지난 두 해 동안 연남동에서 나는 무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던 걸까. 하고 싶은 건 있었다. 어디서 무얼 하든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었다. 유명인의 말, 정보와 트렌드를 발 빠르게 전하는 것 말고도, 온전히 나의 생각과 말을 써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카페 리:본(re : born)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낡은 노트북을 어깨에 둘러메고 곧 추억의 동네가 될 연남동을 거닐다 발견한 카페다. 리:본이라는 어감도 좋고 ‘다시 태어난다’는 말뜻도 참 좋다. 이 곳에서 커피 한 잔 마신다고 금세 다시 태어나진 않겠지만, 어영부영 산문은 하나 썼으니 꽤 괜찮은 수확이다. 활짝 열린 카페 출입문 사이로 신선한 봄바람이 훅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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