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옮겼는데 나는 다시 로제(Rose)가 되었다
대리 나부랭이에서 과장 나부랭이가 되고, 다시 스타트업에 들어가 '~님'으로 불리던 나는 회사가 카카오에 인수되면서 카카오 그룹의 룰을 따라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다. 대학생 때부터 쓰던 영어 이름은 헤더(Heather)였는데 이 이름을 쓰자니 내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들이 몇 가지 생각났다.
"넌 왜 영어 이름이 히터야?"
"우두머리가 되겠다는 의미로 Header라고 지은 건가?"
예상치 못한 질문들을 받으며 '내 이름이 좀 어렵구나' 느끼고 있었기에 슬랙으로 소통할 일도 많고 이름을 부를 일도 많은 이 회사에선 왠지 쉬운 이름을 써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정한 이름은 로제(Rose).
원래 꽃을 좋아하기도 하고 당시에 (신전) 로제 떡볶이에 꽂혀있었던 터라 지은 이름이었다. 물론, 처음 들은 사람들은 블랙핑크 로제를 가장 먼저 떠올렸지만.
그렇게 로제 - 혹은 로즈 - 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영어 이름을 부르는 환경에 너무나 금방 적응해 버린 나는 급기야 영어 이름 부르기 문화가 2주쯤 지났을 무렵 동료들의 한국이름을 잊기 시작했다. 회사의 모든 동료들은 - 사원부터 대표까지 - 서로의 원래 이름과 직급도 잊은 채로 영어 이름을 부르는 환경에 완벽적응 했다. 나 역시 스타트업의 업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한 듯 보였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일해야 하는 하우스-프렌들리 워크 환경이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알게 된 몇 가지 사실이 있는데 우선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알게 된 사실은
- 나는 회사에 출근하는 행위 그 자체로 쓸모 있는 인간임을 느낀다.
- 나는 직장인으로서 아웃핏에 신경 쓰고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 재택근무를 하니 집과 회사의 경계가 희미해져 워라밸이 무너진다.
- 재택근무를 하면서 제공되는 식비를 쓰기 위해 계속 배달음식을 먹고 있는데 건강이 염려된다.
위와 같은 이유로 거취를 고민하고 있던 찰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이 자신이 갓 합류한 회사로의 입사를 두 번째 제안해 왔다. 처음 제안을 받았던 여름엔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계절이 두 번 바뀌고 겨울이 되었을 때 나의 태세는 완전히 바뀌고야 말았다. 나를 밖으로 빼내어줄 회사가 필요했는데 마침 제안받은 회사는 내가 살고 있는 서촌에서 불과 1.9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광화문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다. 광화문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나에게 다시 광화문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메리트임에 분명했다. 더군다나 언제나 '새로운 도전'이란 말에 늘 가슴이 뛰는 나에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금융사 디지털 마케터 자리는 성공이 담보되지 않았기에 더 도전해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스타트업 적응기는 1년 반 만에 막을 내렸고, 광화문에 위치한 대기업 금융사의 디지털 마케팅팀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금융사는 이전에 다녔던 회사들과 비교해 훨씬 더 정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였다. 심지어는 망분리로 인해 내부 PC로는 인터넷을 할 수도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앞으로 통합 론칭하게 될 앱을 마케팅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외부망 접속은 필수였다. 다행히 외부망에 접속할 수 있는 별도 노트북을 지급받을 수 있었고, 그렇게 2개의 노트북을 오가며 금융사 마케터로서의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
재밌는 사실은 이곳에서도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사내 캠페인이 시작됐다는 것이었다. 30대 후반인 내가 어린 축에 속할 정도로 오랜 근속연수를 자랑하는 대선배들이 즐비한 회사에서 갑자기 영어 이름이라니? 회사는 디지털 혁신을 선포함과 동시에 일하는 분위기도 스타트업스럽게 바꿔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잘 될지는 미지수였다.
이곳에서도 나는 영어 이름을 로제로 정했다. 여전히 헤더라는 원래의 이름을 훨씬 좋아하지만 회사에서는 가명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새로 옮긴 회사에서도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사내 문화가 도입되었고 내 책상 앞에는 로제라는 영어 이름이 추가로 붙었다.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시작된 영어 이름 사용 문화는 현재 어떻게 되었을까?
이곳에 합류한 지 벌써 2년이 지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모두 한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한동안 영어 이름 사용 문화에 불을 붙여보고자 적극적으로 영어 이름을 썼던 나였지만 나 혼자 영어 이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소극적인 모드로 변했다. 이전 회사에서는 대표님의 이름도 편하게만 불렀던 나인데 말이다.
결국 유명무실해진 나와 동료들의 영어 이름. 이런 문화가 사내에 적극적으로 전파되고 안착되기 위해서는 리더들의 솔선수범이 필수라는 걸 깨닫는다. 팀 리더분들이 어색해하고, 영어 이름을 못 외우겠다고 한마디 하는 순간 팀원들은 더 적극적으로 '~팀장님', '~파트장님'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팀에 있던 z세대들이 마지막까지 리더들의 영어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현재는 모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이름과 직급을 붙여 부르고 있다.
직급을 떼고 님을 붙인다고 해서, 한글 이름을 지우고 영어이름을 만든다고 해서 일하는 분위기와 사내문화가 바뀌는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 각자 다른 개성을 가진 회사를 연달아 경험하며 느끼고 배운 생각들을 다시 부지런히 기록해 봐야겠다.
그나저나, 당신의 영어 이름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