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걷기 예찬론자가 된 건에 대하여
(이 글에는 미드 And Just Like That의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6월부터 걸어서 출근을 시작했다. 집은 경복궁역, 회사는 광화문역이라 아주 가까운데 - 겨우 1.9km 거리 - 서촌에 2년 가까이 살면서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방법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걸어가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 뒤로는 맑으나 흐리나 비가 오나 걸어서 출근을 한다. (퇴근은 원래도 걸어서 했었다)
그렇게 한 달을 내리 걸어 다니다 보니 걷지 않는 법을 까먹어 버린 사람처럼 계속 더 많이 걷게 됐고 어떤 날은 20,000보 넘게 걷고 나서야 하루가 끝났다. 평균 13,000~15,000보를 걸었고 몸이 가벼워지고 체력도 올라왔다.
날이 점점 더워지면서는 선선한 밤공기를 느끼며 걷는 재미에 푹 빠져 밤 9시 반만 되면 몸이 근질거렸다. 야밤에 약속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급히 옷을 갈아입고 나가 경복궁을 한 두 바퀴 돌았다. (정작 약속이 없는 날 실행 가능한 루틴이었지만)
여느 때처럼 걸어서 퇴근한 어느 평일 저녁, 이나영의 복귀작 ‘박하경 여행기'가 궁금해 100원으로 구독하기 시작한 웨이브에서 무려 55세가 된 캐리, 샬롯, 미란다를 만났다. And Just Like That이라는 제목으로 돌아온 섹스 앤 더 시티의 새로운 시리즈였다. (너무 좋아서 내적 함성을 질렀다)
설마 내가 그녀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했는데 현실이 되다니... 고민할 필요도 없이 에피소드 1을 재생했다. 내가 20대 때 보았던 화려하기 그지없는 캐리, 미란다, 샬롯은 그곳에 없었지만 대신 삶의 수많은 파고를 지나며 켜켜이 쌓인 주름살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멋진 언니들이 있었다. 여전한 패션 센스, 각자가 가진 가치관을 바탕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태도 같은 것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늙어버린 그녀들을 처음 봤을 때의 당혹스러움은 금세 잊혔고 사만다의 빈자리도 생각보다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걷는 걸 멈출 수가 없어"
예기치 못한 큰 일을 겪고 잠을 이루지 못해 새벽부터 나와 하염없이 길을 걷던 캐리가 미란다의 학교 앞 계단에 앉아하는 말이다. 요즘의 나를 가장 잘 대변하는 문장이 캐리의 입에서 나오다니!
이 장면을 보면서 진심으로 캐리를 안아주고 싶었다. 살면서 전혀 예상해보지 않았던 종류의 고통을 경험하고 나면 생각보다 오랜 시간 현실감각이 없다. 잠이 오지 않고 - 혹은 잠만 자거나 - 머릿속이 뿌옇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게 그냥 걷는 것이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캐리가 그랬듯 나 역시 동네 여기저기를 걸었고, 석촌호수는 마음이 우울할 때마다 나를 품어줬던 장소다. (슬픈 기억의 장소랄까)
안 좋은 기억들은 모두 그곳에 남겨두고 궁세권으로 이사 온 나는 보폭을 크게 해 씩씩하게 걷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누구와 함께 걷는 것보다는 혼자 걷는 걸 선호한다. 상대의 속도를 맞춰 걷지 않아도 되고 내 발길 닿는 대로 걸을 수 있으니까. 또 걷는 동안만큼은 오롯이 나를 생각하고 내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생각할 것이 많을 땐 무조건 걸어야 한다. 정작 걸으면서는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것 같지만 걷고 나면 생각이 정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또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생경한 장면들을 통해 아주 신선한 자극을 받기도 한다. 최근의 경험을 공유해 보자면
#걷다가 만난 어떤 장면 1
이른 아침, 출근길에 종종 들르는 에스프레소바 앞에 사이클 동호회원 여러 명이 동그랗게 둘러 서서 여유로운 대화를 하고 있었다. 쫄쫄이 옷을 입고 헬맷까지 쓴 그들의 손엔 에스프레소잔과 소서가 들려져 있었는데 그 언밸런스한 모습이 꽤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흥미로웠던 건 동호회원들의 연령대가 꽤나 다양했다는 것인데 20대부터 50대까지 있는 것 같았다. 화기애애한 그들의 대화를 얼핏 들어보니 함께 달렸던 코스의 난이도에 대한 얘기였다. 모여서 세상 가십이나 남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자신들이 폭 빠져 있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특히 젊은 사람들 틈에서 하나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 모습의 50대 남성분이 인상적이었는데 몸에 딱 붙는 옷을 입고도 허리는 꼿꼿, 배는 납작한 그 모습이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가장 궁금했던 지점은 모두가 바삐 출근하는 시간에 이들은 어떻게 회사 대신 사이클을 하나씩 옆에 끼고 에스프레소바 앞에 있냐는 것이었는데 그거야 연차를 냈을 수도 있고, 노후준비가 이미 끝나서 취미생활만 해도 먹고살 수 있는 상태일 수도 있으니.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동호회원들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걷다가 만난 어떤 장면 2
7월 내내 비가 온다는 괴담 때문인지 다음 날 비 예보가 있으면 ‘걸어서 출근 못 하겠네.’ 하면서 아쉬움을 안고 잠에 들었다가 아침이면 비가 생각보다 안 와서 그냥 걸어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날도 비가 적당히 와서 여느 때처럼 우산을 쓰고 경복궁 앞을 막 지나고 있는데 어떤 여성분이 비를 맞으며 러닝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까만 바람막이와 반바지를 입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빗속을 뛰는 그분의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고, 비 예보를 볼 때마다 시무룩해했던 내 모습이 살짝 부끄러워졌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고민 없이 걸어서 출근하게 된 것은 이 날 만난 빗 속의 러너 덕분인지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인 서촌이 거주지라면 걷기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오래됐지만 개성 있는 건물/가게들, 아름다운 돌담길, 경복궁 앞으로 즐비하게 우뚝 서 있는 현대의 빌딩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광화문 풍경들을 보면 걸을 이유는 차고 넘친다.
이제는 푹푹 찌는 공기와 뜨거워서 데일 것 같은 지열 때문에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자주 걷는다. 가로수 그늘 덕을 볼 수 있는 덜 더운 루트를 따라 출근하고, 시원한 걸 넘어서 서늘한 수준인 회사 지하 서점을 뱅뱅 돌기도 한다. 내 두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엄청난 위로가 된다.
내일이면 (벌써) 입추라는데 선선한 가을바람을 친구 삼아 걸을 생각을 하면 벌써 설렌다. 어떤 계절에도 걷는 걸 멈추지 말아야지. 아무래도 겨울은 힘들겠지만.
"한 달 이상 걸어서 하는 순례는 한편으론,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전에 철학자들이 왜 그렇게 산책을 즐겼는지 이유를 알겠더군요. 사람들은 생각하는 일을 정신 활동으로 여겨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거라 여기지만, 제가 경험해 보니 생각하는 일은 온몸으로 하는 거였어요. 두 다리는 온몸을 지지하고 등과 허리는 짐을 받치고 그러는 사이 머릿속으론 이런저런 생각이 지나가고요. 엄밀히 말하면 생각은 내가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저의 머리는 그저 온갖 생각이 펼쳐지는 무대 역할을 했어요. 처음엔 A라는 생각이 들어옵니다. 조금 후엔 또 다른 생각이 올라와요. 'A가 아니라 B지!' 이게 끝이 아닙니다. '아니야, C가 맞아.' '아니라고, D지!' '아니야, 다시 생각해 보면 A가 아닐까?' 두 다리가 계속 움직여 걸음을 떼는 동안 제 머릿속에선 날마다 생각의 향연이 벌어졌습니다." -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 최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