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것들의 이야기
땅 위를 하얗게 잿빛으로 뒤덮었던 오래된 낙엽들이 사라졌다. 강 옆에 나란히 놓인 빽빽한 숲은 이제 막 솟아오른 초록 물결로 가득 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었다고 생각했던 나무들 여기저기서 작지만 힘차고, 여리지만 꿋꿋한 연두색 새싹들이 움텄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작은 새 생명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진다. 너는 어디에서 왔니, 어느 곳에서 어떤 힘을 받아 이 흑백의 세상에 이리도 당당하게 나와 내 온 마음을 떨리게 하니. 답이 없는 물음을 두 손 끝 사이로 보낸다.
영하의 이자르 강 주변은 다른 어느 곳들보다 더 추웠다. 겨울 아침 뛸 때마다 퍼지는 건 간결한 내 호흡과 퍼지는 하얀 입김뿐, 나무들은 말이 없었다. 하늘을 향해 강직하게 뻗은 그 직선들 사이를 가르는 매일마다 나는 한 줄기 위로를 찾고 있었다. 항상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강박감과 더 뛰어나지 못하다는 죄책감이 꼬리를 물고 나를 따라왔다. 추운 겨울은 그런 내게 동정의 손길을 내어줄 여유가 없었다. 나 스스로 내는 힘겨운 소리만 되돌아오는 하루하루를 나는 희망 없이 달리기만 했다.
분명 엊그제 까지 그렇게 말없이 빈 숲이 었는데, 지난 한 주간 이 곳을 가득 채운 봄이 부리나케 왔다. 아직 낮은 온도는 개의치도 않은 듯 나뭇가지 사이사이에 올라오던 꽃망울과 작디작은 잎사귀들에도 사실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처음 따스한 햇살이 내 볼을 스쳤을 때, 그리고 그 같은 해가 새초롬하게 나온 새 잎들과 이자르 강 위를 환하게 불태우며 빛나는 걸 보자 그제야 모든 것이 변한 걸 느꼈다. 앞으로 한동안은 웅크리지 않아도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게 오랜만에 인사했다.
명상을 한답시고 요가매트 위에 앉아도, 빈야사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우자이 호흡을 해도 날아가지 않고 자꾸만 나를 내려앉게 했던 무거운 고민들이 그 봄이 흘러오는 소리에 그만 사르르 녹았다. 강은 기운차지도 드세지도 않게 잔잔히 흐르고, 새들은 뽐내는 티 하나 없이 차근차근 지저귄다. 그 사이를 채우는 또 다른 새로운 소리는 슥슥 조심스럽게 나무를 다듬는 더 가까운 소리다. 무엇이든 손으로 직접 만들고 빚어내는 걸 좋아하는 남편이 (다시) 새롭게 시작한 나무 공예하는 소리가 이 다시 찾아온 (새로운) 계절 사이를 함께 흐른다.
그 빛나는 것들 아래에 앉아 있으면서 나는 내 마음에도 봄이 왔음을 느낀다. 사라지고 없다고 생각했던 너무나 많은, 잃어버렸던 온화한 생각들이 내 안을 푸르게 뒤덮는다. 남편과 나란히 앉아 나누는 우리의 대화 안에도 자연스럽게 인내와 공감, 반성과 확신이 가득 차있다. 그 거부할 수 없는 따사로운 힘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고 함께 있는 이 시간이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더 이상 내가 바랄 것이 있을까, 지금 이렇게 몰아쳐 들어오는 봄의 소리에 흠뻑 젖어 지낼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