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적 탐닉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또다시 순간의 착각에 휘둘려 원치 않은 일을 벌이고 나중에 후회하는 건 인간의 숙명이다. 그래서 나는 이 아침 머리를 쥐어싸고 어젯밤 유혹에 속아 넘어간 나를 반성한다.
사건의 발단은 어제저녁, 거창하게 계획했던 금요일 저녁 메뉴 대신 단출하면서도 한 주의 스트레스를 날려줄 간단한 알리오 올리오를 만들기 위해 예상치 못하게 7시쯤 슈퍼마켓에 간 것이었다. 거의 하루 종일 앉아서 일했다지만 이상하게 배가 참을 수 없이 고팠다. 슈퍼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입에 넣기 쉬운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포도 한 송이와 짭짤한 피스타치오를 카트에 넣고 나자 뜬금없이 와인 코너에 눈이 갔다.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집에서는 알코올 섭취량이 거의 전무하고, 외식할 때에 기분을 낸다며 맥주를 시켜도 반 컵도 못 마시고 남편에게 넘겨주기 일쑤인데 갑자기 와인 코너라니. 지금 생각하니 더욱 어이가 없다.
늦게까지 이어진 미팅 때문이었나, 제시간에 프로젝트를 마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돼서 그랬을까. 기분이 영 꿀꿀했는데 줄줄이 서있는 다양한 와인들을 보는게 즐거워서 5분을 넘게 고민했다. 그 와중에 '갑자기 무슨 일로 술을 찾는 거야?' 같은 내면의 목소리 따위는 없었다. 한참을 이 병, 저 병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다가 유기농 포도에 비건 제품이라는 마크가 찍힌 독일 리즐링 와인을 집어 들었다. '피스타치오와 함께 마시면 딱이겠다'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다급해져 집에 돌아왔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던 거 같다. 요리할 땐 주로 하루를 정리하며 조용히 생각에 빠지거나 뉴스를 듣는데 어제는 이상하게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 평소 듣지 않던 재즈를 켜고 와인을 마시며 마늘을 편 썰었다. 옆에 서서 와인을 마시는 남편과 주말에 무얼 할까 이야기도 나누며 잔을 몇 번 부딪치다 보니 피스타치오를 안주삼아 시작한 와인은 파스타를 끓이기도 전에 반 병이 사라졌다. 면을 삶을 때 즘엔 이미 기분도 마음도 붕 떠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났다.
마늘향이 깊은 알리오 올리오와 함께 곁들이니 술이 정말 술술 넘어갔다. 모든 게 힘든 금요일 저녁에 딱 어울리는 메뉴였다. 든든하게 나를 안아주는 것만 같은, 부드럽고 넉넉한 저녁을 끝내고 나니 와인병은 이미 바닥을 보인 상태였고 저녁을 마치고 나는 거의 쓰러지듯 깊은 잠에 빠졌다.
일어나니 이미 열 시였다. 물을 한 컵 마시고 가만히 앉아 어젯밤을 생각하니 나름 로맨틱했던 것 같아 비시시 웃음이 났다. 그러나 숙취의 시작을 알리는 두통. 심장이 머리에서 뛰는 듯 쿵쿵쿵 울리니 어제의 일탈이 순식간에 후회스럽다. 평소 아침이라면 사과부터 먹고 분주히 움직였겠지만, 사과의 아삭한 식감이 딱히 끌리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건 어제저녁 파스타처럼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오트밀 (oatmeal)이다.
부모님 세대가 추운 날 딱딱 누룽지를 물에 푹 끓여 따뜻하게 먹었듯이, 오트밀은 요 몇 년간 내가 거의 매일 먹는 주식이 되었다. 냄비를 꺼내 오트밀을 넉넉히 넣고 물을 붓는다. 천천히 뭉근하게 끓여내면 구수한 그 향이 온 주방에 맴돈다. 아삭한 사과를 잘게 잘라 오트밀에 함께 넣고 끓여 그 위에 계핏가루를 살살 뿌리기만 하면 간단하지만 숙취에 딱인 해장 오트밀이 완성된다. 뜨거운 콩나물국을 후후 불듯 푹 퍼진 오트밀을 식혀 한 입 떠먹자 스르륵 속이 풀린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오트밀은 통귀리를 이미 여러 번 찌고 눌러 말린 납작 귀리에 물이나 두유를 부어 익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만들기도 쉽고 준비 시간도 짧다. 죽처럼 끓여 먹는 것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귀리를 이용해 만들 수 있는 요리는 정말 많다.
납작 귀리 그대로
이미 쪄서 나와 그대로 먹어도 되는 납작 귀리는 그대로 두유만 부어 시리얼처럼 먹어도 좋다. 납작 귀리에 건과일이나 견과류, 씨앗류 등을 더해서 섞으면 스위스식 뮤즐리 (müsli)도 완성이다. 알알이 오래 씹을수록 뻥튀기처럼 고소한 풍미가 좋아서 제철 과일과 함께 두유 요거트에 올려 먹으면 든든한 아침 식사가 5분 만에 완성된다.
구수하게 볶아서
모든 곡류는 볶았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납작 귀리는 그중에서도 볶았을 때 향이 너무 진하지 않게 은은한, 정말 좋은 곡류 중 하나이다. 시간이 조금 있을 땐 오트밀을 만들어도 납작 귀리를 냄비에 5분 정도 볶았다가 끓여내면 훨씬 더 맛이 좋다. 오트밀이 아니라도 아이스크림이나 샐러드 위에 바삭한 느낌을 주게 뿌려먹는 것도 색다르게 볶은 귀리를 먹는 방법이다.
뭉근하게 끓여서
본래 오트밀(oatmeal)은 납작 귀리를 물이나 두유와 섞어 끓여서 죽처럼 만든 걸 칭하는 이름이다. 우리가 쌀을 죽으로 만들어 끼니로 먹는 것처럼 스코틀랜드에서 16세기 즘 먹기 시작했다. 통귀리를 소금물에 하루나절 불렸다가 오래 뭉근하게 끓여 죽으로 먹는 게 시작이었다고 한다. 요즘엔 이미 쪄서 나오는 납작 귀리가 있으니 두유나 물을 부어 2-3분 정도만 끓여도 뭉근한 죽이 된다. 귀리는 다른 곡물보다 물을 더 많이 흡수하기 때문에 우리가 먹는 죽보다는 물을 좀 더 넉넉히 부어서 만들어야 식었을 때 쉽게 뭉치지 않는다. 과일이나 땅콩버터를 올려 먹으면 정말 맛있는 오트밀을 먹을 수 있다.
간단하게 불려서
납작 귀리를 밤새 불려 아침에 먹는다는 오버나잇 오트밀 (overnight oatmeal) 혹은 '오나오'는 오트밀과 다르게 차게 먹을 수 있어서 여름 아침으로 딱이다. 자기 전 병목이 넓은 병이나 용기에 납작 귀리와 두유를 섞어 냉장고에 두면 아침에 잘 불려져 부드러운 오나오를 즐길 수 있다. 가지고 다니기도 쉬워서 등교나 출퇴근길에 들고나가 먹기 쉽다.
바삭하게 구워서
밀가루를 대신에 귀리가루로 다양한 디저트를 만들 수 있다. 식감이 쫀득하고 수분기가 많아 촉촉한 머핀이나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좋은 쿠키를 만드는 것도 좋다. 제빵을 할 때엔 귀리가루를 쓰지만 납작 귀리 그대로 구우면 그래놀라(granola)가 완성된다. 뮤즐리에 기름을 약간 더해 오븐에 굽는 게 정석이지만 팬 위에서 노릇노릇 구워도 갓 만든 바삭한 그래놀라를 즐길 수 있다.
통귀리를 밥처럼
손쉽고 간단하게 만들기는 납작 귀리가 좋지만 귀리가 가진 모든 영양소를 제대로 누리는 방법은 역시 통귀리를 불려 먹는 것이다. 껍질을 벗긴 귀리를 물에 12시간 이상 불렸다가 압력밥솥에 물을 넉넉히 붓고 소금 간을 해서 30분 이상 푹 익히면 쫀득하게 씹히는 맛이 좋은 통귀리밥이 완성된다. 이때 다른 팬에 양파와 마늘, 버섯 등을 넣고 볶아 익힌 통귀리를 섞으면 건강한 귀리 리조또도 즐길 수 있다.
귀리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나 다양하다. 술을 마신 후 숙취에 시달리는 날이 아니어도 나는 매일 귀리를 먹는다. 아침 메뉴가 한 달 간격으로 바뀌는 남편은 꾸준히 귀리를 먹는 나에게 지겹지 않냐고 물은 적이 있다. 매일 아침을 귀리로 함께 시작하는 게 누군가에겐 지루한 반복일 수 있지만, 내겐 오히려 포근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어느 곳에 있어도 귀리 한 봉지면 어떻게든 속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기분이 나는 참 좋다.
게다가 귀리는 찾기도 쉽고, 가격도 저렴하며, 만드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저녁 하기 귀찮은 날엔 오트밀을 넉넉히 만들어 책을 읽으며 천천히, 후후 불어 식혀먹는다. 오늘같이 숙취에 시달리는 날에도, 속이 불편한 날에도 귀리는 언제나 따뜻하게 나를 안아 회복의 길로 안내한다.
고생할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아마 앞으로 몇 번은 더 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술을 왕창 마시거나 외식을 거하게 하고 불편한 속을 부여잡고 오트밀로의 귀환을 할 것이다. 그렇게 순간의 즐거움을 즐기고 돌아오는 나를 귀리는 앞으로 몇 날이고 더 따뜻하게 안아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