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꼭 맞는, 편안한 식사
고등학생 때 한 무용수의 허리둘레를 보여주는 텔레비전 쇼를 본 적이 있다. 길고 가녀린 몸의 형태 중간에 줄자를 대고 숫자를 읽은 남성 연예인의 얼굴은 놀라움에 가득 찼고 5초 정도, 과연 어떤 숫자가 나올까 시간을 끌다가 "22인치!" 하는 자막이 떴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한 눈초리와 미묘한 자부심, 약간의 부끄러움을 한 얼굴을 반쯤 가리며 웃었다. 그 남성 연예인이 그녀의 몸에서 줄자를 뗀 후에도 오 분이 넘게 영상은 그녀의 허리둘레와 매끈한 몸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곧바로 내 방에 들어가 허리둘레를 쟀다. 22인치가 아니었다.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어쩐지 떡을 잘못 먹어서 얹힌 기분이었다. 뱃속이 딱딱해지는데 뱃살은 물컹거렸다. 어떻게 하면 가녀린 허리를 가질 수 있을까 검색을 했더니 해외 유명 모델의 옆구리 운동이 나왔다. 잠에 들기 전 양치질을 하는 동안 열심히 팔을 위로 뻗어 반대 방향으로 눕혔다. 쨍쨍히 당기는 옆구리 느낌이 벌써 희망적이었다. 언젠간 나도 22인치 허리를 가져야지. 가느다란 허리선을 가져서 놀라움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며 잠에 들었다.
한 번도 22인치 허리를 가져본 적이 없다. 아무리 말라보려 애를 써도 나는 무용수가 아니었고 가녀리지 못했다. 살 빼기에 좋다는 운동도 다 해보는데 내 허리선은 턱도 없었다. 어떤 여배우는 한 줌만 한 허리를 가지기 위해 제일 밑 갈비뼈를 뺐다는 소문도 들었다. 갈비뼈를 뺀다고? 아무 소용이 없는 뼈라 괜찮다고 서둘러 나를 속삭이며 위로(?) 하던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수술대에 눕기 전 자신의 결정을 돌아보는 환자 같았다. 괜찮아, 갈비뼈 정도야. 정말 얇은 허리를 가지려면 어쩔 수 없지, 하며.
이제 나는 한 줌 허리라던가 숫자 따위에 별 관심이 없다. 남들의 탄성을 절로 자아내고 싶다는 열망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저 어느 날 밥을 먹다가 깨달았다. 나는 무용수도 아니고, 여배우도 아니다. 나는 나이고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이유는 없다.
22인치라는 숫자와 끝갈비뼈의 유무가 인체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나를 오랫동안 포로로 잡아두었다. 내 주변 여자애들 모두가 그랬다. 다들 얇아지고 싶었다.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던가 탄수화물은 절대 먹지 않는다던가 하는 그런 식단이 유행했다. 지금 생각하면 미쳤지 싶은 소량의 음식을 섭취하고도 마음이 불안했고 그 당시에 그건 당연한 죄책감이었다. 쇼와 루머가 내 안에 불을 지폈다면 공동의 암묵적 규율이 그 불을 더 활활 타오르게 했다.
내가 나이기 위해선 나를 알아야 했다. 타인을 기준으로 삼아 사는 대신 건강한 나의 모습을 척도로 삼기로 했다. 근데 건강하기가 마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몸에 좋다는 음식이 너무나 많았다. 찾아보면 혈당 조절에 좋다는 브로콜리부터 단백질이 많다던 염소고기, 심지어 다른 종류의 물까지 챙겨 먹을게 수만 가지였다. 이런 효능, 저런 효능 모든 음식이 나쁠 게 없었다. 그럼 그냥 고루고루 다 잘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어느 날 배에 가스가 많이 차고 아팠다. 손도 따고 약도 먹었는데 온종일 속이 뒤틀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날 아침은 정제 밀가루 대신 다양한 통곡물을 먹는 게 좋다고 해서 값을 더 주고 통호밀빵을 사 와 샌드위치를 해 먹었었다. 호밀 풍미가 좋아서 정말 맛있었고 입자가 굵은 호밀을 씹으니 벌써 건강해지는 것 같았다. 저녁에도 빵을 한 두 조각 더 먹었다. 배가 부글거려서 밤새 잠들기가 어려웠다. 다음 날 아침 전 날과 같은 샌드위치를 먹으려는데 아차, 싶었다. 배가 아픈 게 혹시 이 빵 때문인가?
호밀을 잘 소화하지 못한다는 걸 몇 번은 더 호밀빵을 먹고 나서 완전히 깨달았다. 호밀은 식이섬유가 많아서 장내 유익균을 생성하고 혈관 건강도 도와주는 몸에 정말 좋은 곡물이다. 남들에겐 좋다는데 나는 호밀을 먹는 게 괴로웠다. 고기를 먹으면 몸이 무거웠고 염증이나 근육통이 더 오래갔다. 채식을 시작 한 뒤에도 내게 잘 맞는 채소나 과일이 있는 반면 몇몇 종류들은 속을 불편하게 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비트는 익혀야 더 맛있고 한 번 섭취할 때 적은 양을 먹어야 소화하기 편하다.
모두에게 맞는 완변 식단은 없다.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른 정신과 세계를 만들어 나가듯이 몸의 작동도 하나같이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혈당이 올라가지 않고 어떤 사람은 밥을 먹으면 혈당이 마구 치솟는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우리 개개인의 몸은 완전히 다르게 반응한다. 내게 꼭 맞은 옷이 다른 사람에겐 맞지 않는 것처럼 음식도 그렇다. 내 몸이 편안한 식사를 하려면 내 몸을 먼저 이해하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나는 외부에서 정보를 찾고 기준을 세우는 대신 내 몸이 어떤지 느낀다. 최신 유행하는 비타민제라던가 슈퍼푸드도 내게 의미가 별로 없다. 내 몸이 어떤 유형이라던가 체질이라는 분석도 별 필요가 없다. 배가 고플 때 내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들을 먹고픈 만큼 즐겁게 먹는 것. 그게 나를 건강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