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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리하는유리 Feb 20. 2021

비건과 논비건이 함께 사는 법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원수지간 가문에서 태어나 이루지 못할 사랑을 꿈꿨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현대판을 그리자면 비건과 논비건 (non-vegan)의 결혼생활일 게다. 둘의 이야기가 더 절절한 건 몸에 흐르는 각 집안의 핏줄을 바꿀 수 없기에, 이 생에선 함께 할 수 없는 둘의 운명이 안타까워서다. 그래서 우리는 열렬히 둘이 함께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두고 미화하기엔 두 사람의 삶 안에는 너무나 자잘한, 잔인하게도 현실적인 요소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줄리엣이 원하지 않는다면 몬태규 가문도 나 자신도 다 버리겠다던 로미오는 아마도 줄리엣의 생일이나 처가의 행사에 참여할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을테다.


만약 둘이 아무것도 모른 채 부부가 됐다면 어떨까.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는 도중 줄리엣이 "로미오, 이제 나는 캐플릿 가문의 여자예요!"라고 했다면, 로미오는 내 가문도 버리고 너를 끝없이 사랑하겠다고 했을까, 아님 너와 더 이상 겸상을 못하겠다며 박차고 일어나 떠났을까. 아마도 후자이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비건이 되겠다고 했을 때 다행히 남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진 않았다. 몇 년에 걸쳐 완전 채식으로 식단을 서서히 바꾸고, 채식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기사를 나눠 읽으며 조금씩 내 안의 변화를 그에게 귀띔했다. 뜬금없이 결혼 생활에 비건이 되겠다는 뉴스로 횡포를 놓는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채식인이 되어가는 나의 사고 과정과 근거들을 끊임없이 다 터놓고 얘기했다. 채식에 대한 연구 결과가 새로 나왔다는 기사를 읽으면 연구 지원이 비건 단체나 채식 산업에서 나오진 않았는지, 어떤 방법으로, 규모로, 얼마나 오래 이루어진 결과인지 알아보고 서로 비판적으로 해석했다. 동물 복지에 대해 감정에 호소하는 영상을 보면 실제로 우리가 사고 먹어 온 계란과 육류는 어느 환경에서 오는 건지 찾아보기도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눈물을 훔치는 장면은 우리 둘에게 없었다. 드라마 같은 전개 없이 계획한 듯 착착, 우리는 채식의 세계로 차근차근 발을 들여놓았다.


그렇다고 로미오처럼 나를 열렬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비건이 되어 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처음부터 나는 남편에게 확실히 선을 그었다. 너의 식단은 너의 것이고, 나의 식단은 나의 것이다. 고기가 먹고 싶다면 고기를 먹어라. 치즈가 먹고 싶다면 치즈를 먹어라. 다만, 나는 먹지 않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나의 제안이 구멍이 아주 큰 그물이 아니었나 싶다. 남편의 생각엔 '아, 나는 자유롭다. 나의 식단 역시 자유롭다!' 했겠지만 사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식사는 비건식이니 내가 그를 그물에 낚은 격이다. 번갈아 매일 요리를 하니 남편은 우리를 위해 일 년 중 거의 200번에 가까운 식사를 준비한다. 그 모든 식사는 비건 요리이다. 남편의 주특기 요리인 압력밥솥을 이용한 초간단 버섯 리조또, 까딸란 후손답게 애정 하는 꼬까 까딸라나 (coca catalana), 호기심에 시도했다가 대박을 쳐서 매주 만들고 있는 두부 티카 마살라 (tikka masala) 등 그의 모든 요리에는 동물성 재료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매 번 요리법을 지정해 주는 것도 아니다. 매주 식단을 짜는 토요일 아침 그는 스스로 요리법을 찾아보고 내게 "다음주 수요일엔 인도네시아식 비건 국수를 만들어 볼게."라며 요리법이 올라있는 웹사이트 링크를 보내온다. 그럴 때면 그의 얼굴은 사뭇 진지하고 미션을 성취해야 한다는 열의에 불타 있다. 필요한 재료만 내가 사다 주면 요리를 해내는 건 남편의 몫이다.


내가 비건이라고 이웃들과 동료들에게 얘기하면 다들 하나 같이 남편에게 "아, 그럼 너도 비건이야?"라고 묻는다. 그럼 우리 둘 다 합창하듯 "아니"라고 대답한다. 거기에 양념을 조금 더 추가하는 건 내 몫이다. 남들의 눈에 혹시나 내가 그를 옭아매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을까 싶어 주렁주렁 변명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얘는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다 먹어도 돼. 밖에 나가서 외식할 때 닭을 먹기도 하고, 계란도 먹고, 치즈 샌드위치도 먹고... 나 때문에 방해받는 거 없이 알아서 잘 먹어. 그리고 내가 뭐 강요한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니까. 말이 길어지는데 정말 중요한 건..."


비건으로서 논비건과 함께 사는 건 세 가지 원칙만 지키면 생각보다 쉽다.


첫째,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주면 된다. 나는 남편에게 떼쓰듯 제발 고기를 먹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남편 역시 내게 제발 좀 고기 한 번만 먹어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 한 지붕 아래 살더라도 네가 뭘 먹건 (쓰레기를 주워 먹지 않는 이상) 우리는 서로에게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둘째, 존중을 넘어서 배려가 필요하다. 장을 볼 때 나는 그가 자주 먹는 치즈를 꼭 사고, 그는 비건식 요리법을 만든다. 식성 좋은 남편이 채소가 가득 든 수프만 먹고 배가 고프진 않을까 싶어 빵도 매주 구워 준비해 놓고, 간식으로 견과류도 챙겨둔다. 그도 내가 매콤한 걸 좋아하니 자기 구미에 맞지 않더라도 매운 고추를 송송 썰어 넣는다던가, 내가 좋아하는 현미밥을 압력밥솥에 찰지게 한다던가 하는 그런 작지만 사려 깊은 행동들을 보여준다.


셋째, 때때로 인내하면 된다. 토요일 아침은 남편에게 특별하다. 주중에 누릴 수 없었던 여유로운 시간에 그는 평소보다 조금 거창한 아침을 먹는 걸 좋아한다. 특히 오믈렛을 자주 만들어 먹는데, 치즈와 토마토를 넣어 토스트 위에 올려 먹는다. 매일 아침이 한결같이 오트밀인 나는 후다닥 준비를 끝내고 남편과 함께 주말의 시작을 브런치로 작게나마 축하한다. 다만 식사를 다 마친 뒤 주방에서 나는 계란 냄새는 내게 너무 강하다. 비릿한 냄새와 아침 햇살이 가득 들이치는 그 안에서 나는 참을 인을 마음속에 긋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마 남편도 나처럼 몇 번씩 인내하며 비슷한 순간을 참아냈을 거라고.




때때로 당황스러운 순간들도 있다. 그가 대뜸 "난 비건은 아니지만 채식을 해"라는 발언을 할 때였다. 우리는 친구들과 저녁을 먹는 중이었고 의도치 않게 내 눈이 그를 너무 강하게 쳐다봤다. 채식을? 네가? 분명 이 주전에 치킨 카레를 사다 먹었고 불과 몇 달 전 스페인에서 하몬 (jamón) 햄 샌드위치를 몇 개씩 흡입했는데?


저녁 식사가 끝나고 친구들이 떠나자마자 그에게 던진 내 질문은 "언제부터 채식주의자가 된 거야?"였다. 그는 "우리 채식하잖아"라고 했는데, 나는 어안이 벙벙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고기를 먹으면 채식이 아니야..." 했더니, 그는 당당하게 "우리는 거의 채식만 하잖아. 고기는 가끔 먹는 거고. 그러니까 나도 채식주의자지."라고 말했다. 색이 다른 두 물감을 물에 함께 풀어놓은 것처럼 머릿속이 뿌옇게 차올랐다. 여태껏 나는 채식, 너는 육식으로 선을 그어 놓았는데 내 영역을 그가 차지하려고 하는 느낌이랄까. 근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도 맞았다. 채식인이건 육식인이건 그건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전체 식사의 팔 할은 완전 채식을 하는 남편이 가끔 고기를 먹는다고 완전히 육식인이 되는 건 좀 사기 같았다. 남편은 공장식 가축을 반대하고 그런 축사 방식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많이 염려한다. 그런 이유로 그는 육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채식을 하는 걸 더 마음 편해한다. 이런 마음가짐 말고 채식인이 되는데 다른 어떤 이유가 더 필요할까. 고기 안 먹는 나와 가끔 고기 먹는 남편은 그래서 어물쩡 채식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별 탈없이 함께 잘 산다.


핏줄 다른 로미오와 줄리엣도 결혼해서 같이 살다 보면 아마 이렇게 깨닫는 순간이 있었을 거다. 몬태규건 캐플릿이건 이름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사실 너나 나나 우리는 다 붉은 피를 가지고 있고, 한 공간에서 살아가는데 식단이나 가문은 사랑이 있다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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