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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리하는유리 May 24. 2021

비건의 소비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선물로 무엇을 보내는 게 좋을까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은 "내가 정말 잘 쓰고 아끼는 것을 나누자"였다. 나는 자몽향이 상큼한 핸드크림을 선택했다. 코로나 덕에 손을 더 자주 씻게 되니 친구들이 실생활에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물성 재료도 들지 않고 동물 실험도 하지 않은 그 핸드크림은 향이 오래가진 않았다. 바르는 순간 싱싱한 자몽향이 톡 쏘고는 금세 사라졌다. 보통 향이 오래가는 제품들과는 달라 친구들이 좋아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재활용한 종이로 만든 포장지로 제품이 든 박스를 둘러쌌다.


비건이 되기 전 예상하지 못했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생활 속 향이다. 예전엔 로션이나 샴푸를 쓰면 향이 오래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한 번 씻고 나면 하루 종일 내게서 향이 나니까 오히려 이득이었다. 그래서 화장품이나 욕실 용품을 살 때 항상 향을 꼭 맡아야 했다. 처음 비건 제품을 샀을 땐 향이 지속되지 않는 게 아쉬웠다. 일부러 향이 좋고 강한 제품을 골라도 처음 바를 때의 그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향은 곧 사라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벨기에의 한 작은 도시 겐트에 있는 정원에 들렀을 때 그 이유를 깨달았다. 풀과 꽃 사이를 지날 때마다 향긋한 꽃내에 끌렸지만 그 꽃들을 지나고 나면 향은 더 이상 공중에 남지 않았다. 인조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려면, 향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아쉬워할 필요도, 오래도록 향을 붙잡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는것이었다.


비건은 먹는 것뿐만 아니라 쓰는 것에도 동물성 재료를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매일 쓰는 화장품과 샴푸, 샤워젤 등 많은 것들에 동물성 재료가 들어가고 식물성 재료를 쓴다 해도 동물실험을 거쳐 나오는 제품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비건이 된 후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브랜드나 그런 사실을 알려주는 인증마크 등을 공부했다. 유럽연합은 이미 2004년 화장품을 동물에게 실험하는 것을 금지했고 2009년엔 화장품에 들어가는 각각의 재료들이 동물실험을 거쳐선 안된다는 법을 제정했다. 더불어 2013년부터는 동물실험을 거쳐 나오는 화장품을 광고하는 것도 불법이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아직 가능한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법 제정이 시급하다. 


Save Ralph, 동물실험의 현실을 알리기 위한 짧은 애니메이션
화장품에 쓰이는 각종 인증마크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은 화장품들은 그 성분뿐만 아니라 포장도 친환경으로 나온다. 샴푸나 샤워젤은 항상 플라스틱 통에 담아져 팔기 때문에 사면서도 그게 꼭 필요한 포장 방법인지, 다른 대체방법은 없는지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요즘엔 비누 형태로 나온 샴푸나 샤워젤을 사고 얼굴도 클렌징 폼이나 다른 화장품 대신 비누로 씻는다. 작은 종이 상자에 담아 나오는 비누는 여행 다닐 때도 유용하고 자리도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집 욕실엔 이제 큰 플라스틱 통들 대신에 사각형의 비누가 놓여있다.


이런 화장품이나 욕실 제품은 식제품보다는 상대적으로 구매 빈도가 낮아서 쓰레기가 나올 일이 먹는 것들보다는 적다.  비건이 되고 렌틸이나 콩, 곡류를 더 많이 먹어서 플라스틱으로 포장된 쌀을 사는 게 마음이 불편했는데, 다행히 우리 도시에는 "포장 없는 가게 (verpackungsfreier laden)"가 두 곳이나 있다. 우리가 자주 먹는 식재료나 세제들을 천으로 된 작은 봉투나 유리병에 담아 무게 별로 가격을 낸다. 쓰레기를 줄인다는 의미도 있지만 내가 큰 슈퍼마켓 대신 이 작은 가게들을 선호하는 건 주인과 대화를 나누며 소통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포장 없는 가게를 방문한 지 세 번째 되던 날, 매번 눈여겨봤지만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 과연 내가 사도 쓸 수 있을까 싶었던 재료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해바라기씨를 말려 만든 콩고기 식감의 재료인데 맛은 어떨지, 그냥 다른 콩고기처럼 쓰면 되는 건지 인터넷을 뒤져보려 했다. 그 사이 주인이 옆에 조용히 다가오더니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 재료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왜 일반 콩고기와 다른지, 자기는 어떤 요리에 써먹는지 등 다양한 팁을 알려줬다. 자신감 있게 해바라기씨 '고기'를 사 왔고 이제 우리가 항상 그 가게에서 사고 먹는 우리 식단의 한 부분이 되었다. 


내 소비 방식은 지난 5년 간 아주 천천히 바뀌었다. 전과는 달리 이젠 포장이 화려하고 광고가 멋진 제품들보다 사람을 이어주는 것들과 곳에서 소비하는 걸 더 좋아하게 됐다. 나와 우리 남편을 이어준 일등 공신인 내 친구 마리와 정말 오랜만에 암스테르담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밝고 빛이 났다. 옷이 정말 예쁘다는 내 칭찬에 그녀는 사실 이 옷이 벼룩시장에서 산, 중고 옷이라고 얘기했다. 패스트 패션 (fast fashion) 대신 그녀는 빈티지 옷을 사서 입고 그녀만의 색을 찾았다고 했다. 유기농이나 친환경으로 만들었다는 새 옷을 사는 대신, 이미 만들어져서 우리가 입을 수 있지만 입지 않으면 쓰레기가 될 옷들을 입는 것이 더 환경에 적은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였다. 누군가에게 많은 추억과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었을 옷들을 입어서였을까, 그녀의 얼굴이 더 깊고 성숙해 보였다.


비건이나 친환경 마케팅에 넘어가 새 제품들을 사려고 했던 나 자신도 반성했다. 코코넛으로 만들었다는 보울부터 유기농 솜으로 만든 티셔츠까지 다 좀 더 쿨해보였기 때문일까, "환경을 지키자"라는 취지로 나오는 제품들은 다 사야 할 것 같았다. 집에 이미 내가 직접 만든 보울도 있고 아직 몇 년은 거뜬히 입을 수 있는 티셔츠도 있는데 더 많은 것을 살 필요가 없었다. 대신 내가 이미 가진 것들을 더 아껴 쓰기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좋아 보여 샀던 옷들이나 가방도 더 자주 쓰고, 단추가 떨어지거나 조금 구멍이 나면 꿰어 쓰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고 옷장에 쌓아있는 옷들은 중고 거래 앱에 올려 팔고 있다. 내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옷들이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에게 꼭 필요한 구매일 때가 많다.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파는 대신 기부한다면 더 좋은 일이지 않을까 생각했을 때도 있었다. 우리 회사에서 분기마다 하는 이벤트로 난민들과 노숙자 분들께 옷을 무료로 나눠주는 기부 단체에서 1일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 우리의 임무는 큰 물류창고에 쌓아있는 박스에 든 옷가지와 신발, 가방 등을 분류하는 일이었다. 열다섯 명의 팀원이 열 상자를 채 못 끝냈는데 기부센터 직원 분 말씀으로는 한 주에 20 박스를 넘게 받는 일도 있다고 했다. 옷이 필요한 사람보다 더 많아서 기부한 옷을 분류해 소각하는 게 단체의 골칫거리라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옷을 쓸데없이 사고 쉽게 바꾸는지 깨달았다. 예전엔 예쁜 옷을 사서 자랑하는 게 일이었는데 이젠 얼마나 오랫동안 새 옷을 사지 않았는지가 내 자랑거리가 되었다.


내가 소비에 대해 배운건, 나를 먼저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사는지, 어떤 생활 방식으로 사는지, 어떤 음식을 자주 먹고, 어떤 용품들을 자주 쓰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얼굴과 몸을 가졌는지 등 나의 내면과 외면 모두에 신중해야 한다. 비건이 되고 내가 더한 가치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이 물품이 만들어지는 과정 중 누군가에게 해를 입혔는가?"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누구에게도 고통이나 아픔을 주었다면 그 물건을 쓰면서 내가 진정으로 내가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일 먼저 나를 이해하고 나면 멋모르고 엉뚱한 물건이나 옷을 살 일이 없고 쓰레기를 만들 일도 적다. 그리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 물건을 오래도록 아낄 수 있다.


또, 다른 사람과 나를 이어주는 소비를 하기로 했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던 우리나라의 환경 운동처럼 독일과 네덜란드 등 몇몇 유럽 국가에는 그런 문화가 실생활에 잘 녹아있다. 내가 사는 바바리아 지방은 집 앞마다 'zu verschenken (무료로 가져가세요)'이라고 적힌 상자들이 곳곳에 놓여있다. 읽고 난 책들, 잘 작동하지만 더 이상 쓸모없는 물건들을 집 앞에 두면 누구든 지나가다가 주워갈 수 있다. 그렇게 가져온 물건들이 집에 꽤 되는데, 정말 신기한 건 그런 물건들에 더 애정이 간다는 거다. 중고로 사는 물건들도 그렇다. 누군가의 손 때와 역사가 묻은 것들이 나와 그 이름 모를 사람을 연결해주는 묘한 기분이 든다. 


걱정과는 달리 그 핸드크림이 친구들에게 유용했던 것 같다. 아끼는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고심한 덕을 봤는지, 친구들이 모두 너무 잘 썼다며 한 마디씩 고맙다고 해줬다. 멀리 있어 자주 보지 못하는 친구들과 나를 이어준 소비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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