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 사람을 잃게 하네
심사 때 나온 지적사항을 고쳐서 다시 만나는 오늘 느꼈다. 잘 보이기 글렀다고. 왠지 모르게 나를 포기한 느낌이 들었다.
지도교수가 인터럽트 하는 바람에 수정본을 예정보다 반나절 늦게 보내게 됐는데, 나를 만나자마자 ‘너무 늦게 보내서 못 봤다’는 말에 나는 죄송하다고 할 뿐이었다. 내가 준비해 온 논문을 스르륵 넘겨보며 몇 가지를 추가로 수정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심사원원장으로 나가기 때문에 (논문이) 잘 나갔으면 하는데, 그렇게 하기 어려워 보여서 마무리할 수 있는 정도만 말한다’고 하는데 마음이 조금… 그랬다.
어떤 마음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위축, 우울에 가까운 듯하다. 그냥, 고칠게 많은데 네가 안될 거 같으니 이만큼만 하자고 낙인찍힌 느낌이었을까. 한때는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던 그 교수의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나를 조준할 때 특히 그랬다. 가능성이 배제당하고 그냥 포기된 느낌이다.
내 논문을 다른 사람이 보면 부끄러울 거라고 하는 그 교수 앞에서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창피를 주는
그 앞에서 나 마저 내 논문이 창피해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직도 나를 챙기기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온 신경이 쓰였다. 나부터도포기한 모습이 드러나서 내게 실망했을까? 하는 그런 생각. 10년 전부터 쌓아온 이미지가, 좋았던 기억이 다 벗겨져 버린 거 같았다. 마치 알록달록한 사탕껍질이 벗겨졌는데 안에는 흑하고 구멍 난 사탕인 게 들통난 느낌이랄까.
피드백 후에 교수님은 졸업하고 나서 뭐 할 거냐고, 학위가 도움 되냐고 물었고 내가 하려는 게 그냥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건지 물었다. 그 질문이 미묘하게 내가 가지고 있던 불만을 건드리니 날 것의 답변을 되돌려줬다. 졸업이나 하면 그때 생각해야겠다, 학위 도움 안 된다, 배우려고 왔는데 실제로 부족함이 많았다 등의 답변으로.
무엇을 준비할까 어제부터 고민한 다과가 내 손에서 건네지는 게 무료해졌다. 8년 전에 들어와 봤던, 동경하던 그 교수님의 연구실에 대한 향수가 다 흩어지는 것을 보고는 그 자리를 나왔다.
보여주고 싶다. 내 이름이 내가 하려는 분야에서 어떻게 불려지는지. 그러나 자신이 없다. 그냥 욕망 같은 걸까. 자존심일까. 불타오르는 복수심과 그럴 수 없다며 스스로를 냉정하게 바라본 판단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가 내게 한 말들이 뇌리에 박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