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날, ‘그린이 탈출기’에 온점을 찍다’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 글 에필로그에 면접 때 나온 내용을 기록했는데,
4년이 조금 안된 오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입사하자마자 장애 가족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하고 싶다며 팀장에게 어필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들보다는 장애인 혹은 가족 단위로만 진행되었고 내가 맡은 일은 비장애 가족을 위한 개발과 운영이었다. 몇 해 지나 특수 학급 아동의 가족을 위한 캠프가 시작되었다. 그때에는 나의 직무는 교육에서 치유로 바뀌어서 하고 싶은 사업임에도 장애인 가족 사업은 교육분야인지라, 맡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던 사업이 남의 손을 탄 기분과 나야말로 정말 잘할 수 있는데! 하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다시 시간이 흘러 교육 업무를 맡게 되었다. 새로운 일터는 같은 듯 달랐고, 그곳에 적응하는 도중에 퇴사 생각하길 두 번을 거쳤다. 적응할 때 필요한 100일이 지나서였을까, 수년 전 나의 가장 큰 바람이었던 장애 가족을 위한 캠프를 드디어 할 수 있게 되여서였을까. 나는 다시 회복했다. 프로그램을 정성스레 하는 것은 기본, 대상자들을 위해 세심한 마음이 쏟아졌다.
첫 회차는 바쁜 와중에 대상에 맞춰 전문성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려 했다. 실제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운영’이었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래도 내가 바란 캠프는 그들을 위로하고 쉼이 있는 거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두 번째 회차는 20명을 모집하는데 200명이 지원한지라, 최대한 늘려 60명을 대상으로 했다. 소수에게만 제공하기 미안한 마음에 늘렸으나 모든 가족과 소통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특성이 다양한 장애 아동을 데리고 한 공간에서 모두가 집중한 프로그램을 한 건 스스로에게도 의미 있고 보호자에게도 놀라운 시간이 되었다.
세 번째 회차는 올해 가족대상 마지막 회차라서 더 정성을 다하고 싶었다. 그저 아이들과 보호자들에게 친근히 다가가 한 번 더 웃게 하는 역할로. 비장애 아동과 장애 아동 모두에게 골고루 관심을 쏟아보며, 이름 한 번이라도 더 부르면서. 그 마음을 알았을까, 캠프를 마치고 받은 설문에는 몇 년 동안 운영한 중에 처음 받아보는, 나를 쓰다듬는 말이 적혀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아이들을 이해하는 거 같았다 ‘
친절하다, 전문성 있다, 아이들에게 잘해준다는 뭐 많이 들어왔지만 이해한다는 말은 다르게 다가왔다.
과거 면접 때 나의 눈물버튼이 되었던 ‘마음을 알아주는’에 가까워진 거 같았다. 그래서 조금, 아주 조금 더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매 캠프마다 바라본 아이들은 하루사이에 친해져서 이튿날이 되면, 장난치고 뛰어다녔다. 그리고 하나의 관심사로 나이 상관없이 친구가 되는 모습은 순수했고 사랑스러웠다. 우리가 감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로 보이기도 했다.
보호자들은 두 가지 모습이었다. 마음에 짐을 안고도 웃으며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모습, 잔소리를 하다 하다 언성을 높이고 마는 모습. 그들 안에는 약간의 고단함과 깊은 사랑이 있음이 보였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그동안 고생한 엄마가 자꾸 겹쳐 보여서 알 수 있었다.
내 마음이 제일 머문 곳은 장애 아동의 형제자매였다. 나처럼 동생에게 답답함을 표출하며 짜증 내고 부려먹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은 서로 잘 챙기네? 배려하네?라는 생각이 들었고 괜스레 반성하며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엄마가 하는 말로는, 다들 비슷한 조건으로 모여서 그랬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거라면, 이런 모임이 늘어나고 그 속에서 안전한 경험을 쌓아가서 앞으로도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충분히 사랑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형제자매의 장애가 나를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대할 존재도 아닐 뿐더러 나 자신은 함부로 대하는 인격이 아니기에.
타인에게 선대 하듯 내 장애/비장애 가족도 당당히 사랑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다음에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