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 down and look around
오랜만, 거진 3개월 만에 글을 쓸 시간을 얻었다. 온갖 핑계를 대며 글쓰기를 미루고 잊어보려 하다가 결국은 한적한 정원에 홀로 앉아 글을 적어낼 수 있는 형편이 생겼다.
한동안 나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피드백을 들을지 두려울 필요 없는 대상에게나마 내 가치를, 속마음을 털어내고 싶을 때 글을 쓰곤 했다. 여행 중에서, 자연 속에서 발견한 즐거운 깨달음을 기록하고 싶었던 장소가 그렇게 바뀌었었다. 조직문화에 반발하는 내 글에 위로를 얻기도 하고 조직 구성원과 나누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연락은 내가 무뎌지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글의 주제가 그리고 내 머릿속이 회사에 대한 불만으로 채워지는 것에 지쳤던 것 같다. 이제는 사소하더라도 주변의 것들을 묵상(정향 orient, 음미 savor, 사랑 love 같은)하는 이야기를 적어내고 싶다. 속도를 낮춰야지만 볼 수 있는 것을 잔뜩 누리겠다는 말이다.
그 시작은 현재 내가 있는 정원이다.
내 기억이 살아있는 초등학교 이후의 행복한 순간의 환경적인 특성을 보면 정원이 있었다. 때론 텃밭이기도 하고 때론 숲이라는 모습이었다. (석사까지도 정원을 공부를 했고 인터넷에 쳐서 나오는 기본적인 지식정도는 이미 아는 바이지만 그런 딱딱한 말 말고 정원에 존재 being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설명해 보자면) 정원은 독립된 공간에 생명이 깃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몸과 마음을 천천히 흘러가게 하는 장소이자 장치다.
그런 정원이라서, 급히 주어진 일에 매몰되어 그 끝이 어떻게 난지도 모르다가 기억이 다시 시작되는 지점에 나는 정원에 있었다. 아래 같은 이유로.
1. 독립됨이 필요하기에. 아늑함과 안정감을 주고 급하게 돌아가는 외부환경으로부터 보호막을 만들어준다. 그래서인지 정원에 들어서면 정원 밖으로 차들이 지나다녀도 위협되지 않는다. 실제로 차가 정원으로 진입한다 해도 나는 안전할 거다. 완충작용을 하는 식물이고 장식물이 있으니까. 또한 그러한 단절은 급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지도 모르던 소용돌이에서 잠시 빼내어 준다. 몸과 마음을 천천히 흘러가게 하는 장소이자 장치라는 말이 이와 연결된다. 자기 전에도 퇴근길에도 생각나던 일이 정원에서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눈과 귀, 코를 사로잡는 것이 너무나도 많기에. 사람은 쉼과 아름다움이 있는 정원에 동화되는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독립되어 있으나 누구와도 연합하는 이곳과.
2. 생기 있기에. 잎을 다 떨구고 겨울을 보낸 식물들이 초록빛을 빼꼼 내밀고 있는 모습은 사계절 중 가장 설렌다. 그럼에도 각기 다른 꽃과 열매를 보여주는 여름은 어떻고, 색색의 옷으로 갈아입다가 슬그머니 춤추며 땅과 만나는 잎이 아름다운 가을은 어떻고, 푸르름은 덜하지만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정적을 깨는 새와 눈을 맞출 수 있는 겨울은 어떤가. 무슨 계절을 따질 필요 없이 아름다운 게 정원이다. 물론 정원에는 식물 말고도 다양한 무생물도 있다. 정원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조형물, 편안함을 좌지우지하는 의자와 탁상, 감성의 끝판왕 조명까지. 이것들은 생명력 있는 작고 작은 새싹부터 울창하게 뻗어 새들도 멈춰가는 자리를 만드는 나무와도 어우러져 뭐든 충분한 공간을 만든다.
3. 어디를 보아도 감각이 머물기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보고, 무분별한 소리를 들으며 원치 않는 공기를 마시고 살아가는 시대에 잠깐이나마 감각기관이 편안해진다. 살랑이는 바람과 따스한 햇살을 느끼는 촉감을 비롯한 모든 감각이 깨어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이런 사소함도 전혀 사소하지 않은 것임을 느끼고 나니 '아, 나 지금 정원에 있구나' 인지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 눈이 머무는 곳은 그냥 특별해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다. 잎도 없고 지난해 맺은 열매꼭지가 남아있는 고동색 나뭇가지. 아름답다. 나뭇가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잠재력이. 이름 모를 새소리가, 고개를 숙이면 맡을 수 있는 발 밑에 있는 애플민트의 상큼함이. 그리고 따듯한 햇빛이 만든 내 그림자 또한.
아빠와 함께 해바라기를 심었던 텃밭, 필리핀 선교사님 집에서 바라봤던 뜨거운 해가 내리쬐는 망고나무 정원, 고요하고도 훌륭한 자극이었던 영국 버밍엄의 보타닉가든, 떨군 고개를 들어 상쾌함을 주던 태기산자락, 도심 한가운데 여러 식물에 둘려 쌓인 여기. 모두 한 줄로 표현하기 어려움을 겪고 나서 만난 곳들이다. 지나가는 군데군데에 정원이 있는 거거나, 지친 내가 무의식적으로 그곳을 찾는 거거나. 무엇이든 정원과 같이 해서 다행이다.
지나치게 힘들여 살고 있다면, 주어진 일을 하느라 급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무엇이든 지쳐버리거나 무뎌졌다면 잠깐 시간을 내보자. 비가 오든 해가 떠있든 10을 들이고도 100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을 거다. 환란 중에 피난처가 되고 자신을 발견하기까지 할 거다. 지극히 나의 경험이지만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거의 그렇지 않을까? 그러니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주변을 둘러보아 묵상하고 정향하고 음미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