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 down and look around
샤워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대충 씻고 있네?
갑자기 거리를 둘 필요는 없다. 무척이나 청결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거품을 내고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씻는다. 다만 뭐 그렇게 급한 일이 있다고 깨끗이 씻을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어쩌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 급히 살아가는 거 아닐까. '이 정도면 됐다'하는 생각, '다른 게 더 시급하니까'하는 그런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들은 휘리릭 지나는 거 아닐까.
나도 마찬가지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정확히는, 샤워를 청결의 목적으로만 바라보아서 그만큼의 시간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니까, 누가 상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인정해 줄 일도 아니고, 덧입고 덧바르는 게 중요하지!라는 입 밖으로 꺼내보진 않았지만 이상한 논리가 깔려있었나 보다. 온전히 내가 나를 대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대하는 시간. 단순히 먼지를 씻어내는 것 이상의 목적을 발견한 순간, 손에 든 샤워타월에 거품을 내고 곳곳을 정성껏 그리고 힘차게 문질렀다. 뽀득뽀득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클렌징폼도 마찬가지로 거품을 풍성히 내고 거품으로만 세안을 했다. 지금까지 약간의 거품과 손으로 비볐던 얼굴이 몽글몽글 거품에 쌓이니 스스로 조심스럽게 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부터 뜨뜻한 물로 씻어냈다. 평상시랑 같은 단계로 샤워를 했는데 오늘은 뭔가 품위 있는 샤워 같았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기분 좋은. 샤워를 마치고 평상시 쓱-싹- 뭉치든 말든 듬뿍만 바르던 바디로션도 골고루 펴 발랐다. 머리를 말리며 오늘 친구에게 받은 생일선물을 뜯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생일을 맞아 보내준 립밤. 유통기한이 지나도 한참 지났지만 남아있어서 쓰던 립밤대신 영양 듬뿍 새로운 립밤을 발랐다. 내일 특별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자기 전에는 팩도 해볼 각오로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생일 선물로 받은 것들 중 케어 용품들을 뜯지 않은 채로 있었다. 이유는, '지금 쓸 필요가 없으니까!' 헤어 에센스? 지금 머릿결 괜찮은데 왜? 라든가, 향 좋은 바디워시? 음 지금 쓰는 것도 유통기한 다가오는데 굳이? 라든가, 립밤? 어휴 집에도 넘친다! 이건 나를 챙기지 않는 핑계일 뿐이었다.
나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샤워부터 해보자. 그냥 씻지 말고 내 피부에 닿는 거품과 손의 압력을 느끼고 향을 맡고 따뜻한 온기를 느끼자. 그러다 보면 내 기분도 한껏, 자존감도 한껏 올라가 있겠다. 그리고 내킨다면 스킨로션도 바르고 뽀송한 속옷도 입어주면 좋겠다.
별 것 아닌 반복되는 작업 속에서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드러나는 것 같다. 이래저래 인정받지만 무진장 바빠서 시간이 어떻게 간지도 모르게 잠드는 유명한 자, 이래저래 먼지 먹고 대가 없이 땀 흘려도 개운하게 씻어내고 감사일기를 쓰며 잠드는 무명의 1인. 나는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오늘부터는 스스로 사랑하는 후자가 되고 싶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스스로 인정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인 요즘 세상이라.
그래서 내일도 씻어야겠다. :)
아, 샤워타월도 바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