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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Apr 20. 2024

병가

slow down and look around

어린 시절에 여기저기 아프다는 말을 하면 '그런 거로 병원 가는 거 아니다', '나도 아프다'와 같은 말을 종종 들었다. 그래서 병원을 가기보다 견디는 게 익숙했고 그 결과 나는 겁은 많지만 아픔은 꽤 잘 견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3월 말 무자비하게 프로그램 투입이 되었다. 주말근무까지 한 터라 주일 하루 쉬고 다시 근무를 시작하려니 온몸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근육통, 두통, 설사, 기침, 가래, 고열, 혈뇨...


쉬고 싶다는 생각도 제대로 하질 못했다. 내게로 배정된 단체들도 있었고 작년부터 준비해서 이제 곧 시작을 앞둔 사업도 있었다. 맡은 일이 이렇게 많은 데 어떻게 쉼을 생각할 수 있을까. 아픈 직원을 보면 '본인 없어도 회사는 돌아간다!'라고 주장하며 회복의 시간을 가지길 바랐으나 정작 나는 많은 부담을 지니고 있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수준으로 견뎌봤자 남는 건강 악화, 씁쓸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이미 몇 차례 경험해 봤다. 두해 전 몸에 칼을 대는 수술을 하고도 일주일 만에 복귀해서 무거운 쌍화차 돌잔을 나르다 혼자 쓰러지기를 며칠 했다. 누구도 몰랐지만 그렇게 버티다가 결국 병가를 썼었다. 남들 1달이면 회복할 것을 5달이 걸리는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작년 이맘쯤에도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몇 날 며칠 열이 나고 고통스럽게 기침을 해도 그-냥 버텼다. 내가 맡은 일의 양이 방대했고 누구도 해줄 의향이 없다고 판단했었다. 결국 한 달 반 이상 감기가 지속됐다. 일을 쉬지 않았더니 근무 외 '나'의 시간까지 피해를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 그렇게 내 몸을 위하는 일에 인색했을까.


일이 많다고, 오래 자리 비우기 미안하다고 해서 무리해서 출근했던 게 무엇을 위한 것인지 보면 나를 위한 건 전혀 아니었다. 굳이 찾으면 불편한 마음 해소 정도. 그러나 그게 정말 내가 바라는 것인지는 잠깐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을 거다. 나의 몸은 회복을 바라고 나도 눈치 보지 않고 내 건강먼저 챙길 수 있길 바란다. 아픈 때에 쉬지 못하는 것은 내 병만 키우는 거고 내 고통만 키운다. 그리고 계속 골골대느라 결과적으로 일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없기도 하다. 근데 마지막 이유는 그냥 하나의 핑곗거리고 앞서 말한 나를 위한 이유가 더욱 중요하다. 




여러 증상과 주변에서 심각성을 먼저 발견한 덕에 회사를 얄밉게 출근하고 있다. 앞으로도 병가가 격주로 예정된 상황이다. 나를 위한다고, 건강이 최우선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한 마음은 이렇다. 


첫째로는 업무 걱정이다. 

나만 처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업무를, 정확히는 나 혼자 기획한 터라 남에게 철저하게 인계하는 것도 일인데, 그렇게 하더라도 구멍이 생길 것 같은 업무들이라서. 그 일들을 촉박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혹은 부족한 시간 때문에 차질이 생길까 봐, 충분히 준비해도 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앞선 걱정. 즉 나를 돌보는 데에는 쓸데없는 걱정. 남이 안 하면 결국 믿을만한 미래의 내가 할 텐데 말이다. 


두 번째는 동료들에 미안함 뒤에 숨어있는 불안함. 

직원들이 싫어하고 불만을 가질 거라는 생각이 있다. 이미 직접적으로 불만을 이야기한 직원도 있었고, 이 글에 포함시키기에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말들에 여러 번 시달렸기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렇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내가 아픈데 그들의 생각이 뭐 그리 중요한가. 지금 회복하고 관리해야 앞으로를 살아가는데 괜한 에너지 낭비말자 싶다. 


세 번째는 평화로움.

집에 있으면서 마주하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마주치기도 하지만 일을 떠나 자유로운 것이 모든 병이 낫는 기분이다. 체크리스트에 쓰여있는 것들을 하나씩 처리하며 급하게 돌아가던 사무실에서 벗어나 이제야 세상이 천천히 흘러간다. 초록초록 보송보송 머리칼이 난 산들도 보이고 벚꽃이 떨어지자마자 선명한 색으로 매운 키 작은 나무의 꽃들도 보인다. 출퇴근 시간과 다른 낮의 풍경은 반짝이고, CT 촬영 후 아빠와 마시는 밀크티도 맛 좋고, 요즘따라 고운 우리 엄마 얼굴도 더 자주 보아서 행복하다. 


아픈 건 늘 별로지만, 아프고 나면 좋은 점이 있었다. 남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는 것과 그리고 건강한 삶을 위해 아주 조금이라도 변화한다는 것.



남에게 보일 걱정보다 내게 있을 좋은 점을 먼저 생각하는 것도 자신을 위하고 향유하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


처음부터 아프지 않으면 좋겠지만 혹시나 몸이 신호를 보낸다면 기회로 삼고 급히 돌아가는 삶에서 병가를 내도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다. 


쉽지 않은 환경도 있겠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몸과 마음이 잠시라도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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