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다니는 남편을 둔 아내의 이야기
1월 즈음이었나,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던 날이 있었다. 남편의 출장으로 인한 부재. 알고 시작했지만 4주 출장에 3일 귀국 후 다시 출장은 해도 해도 너무 한 거 아닌가 싶어 화가 부글부글거려 결국 카톡에서 터져 버렸다. 빡침의 주된 주제는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문제는 쏟아 낸 이후였다. 나의 화를 다 분출했으니 좀 편해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더 찝찝해졌다. 반대로 생각하면 입사한 지 3개월도 안된 사람이 타국에서 얼마나 불편하고 어려울까 싶었다. 내가 그 상황이라면 울고 싶었을 것 같은데, 그는 꽤 단단히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거기다 내 안에 화가 있으니 눈치 빠른 이선호가 다 알아차려 괜한 짓을 했다고 바로 자책모드로 돌아섰다.
_
그리고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1. 그는 자의로 입사하였고, 출장이 많은 직군일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2. 이 생활이 싫다고 당장 그만두라고 하거나, 직군을 바꾸라고 강요할 수 없다.
3. 나는 이슬기찬을 응원한다.
4. 그러므로 이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야 한다.
_
지금은 남편의 출장을 받아들인 상태다. 선호에게도 아빠가 마닐라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왜 집에 오지 않는지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고 보여준다. 다행히 이슬기찬이 종종 유튜브에 나오기에 화면으로 보여주면 선호도 바로 이해한다.
주변 사람들이 "괜찮아?"라고 물을 때 "응, 다 적응 중이고 괜찮아."라고 말할 여유도 생겼다. 오히려 24/7 붙어 일하던 지난 5년의 시간보다 더 낫다고도 말한다. 이것도 사실이니깐.
_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지 않은 날들이 나에게도 찾아온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둘러싸는 시간이 있다.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엄습한다. 내가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안 좋은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의 끝엔 내가 이미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불안이 나를 잠식한다. 엄마라는 직업으로 아이를 양육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보이는 보상(돈)이 없기에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억지 논리에 나를 가둔다. 불안한 완벽주의자 같은 모습이 남아 있어 아이 양육에 대한 부담도 함께 느낀다.
나는 이럴 때 가장 빠른 특효약이 이슬기찬과의 대화라는 걸 아는데, 그가 지금 내 옆에 없으며 원할 때 바로 연락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 괜찮지 않은 기분이 지속된다.
_
나는 내가 꽤 독립적인 사람이라 여겼다. 연애할 때도 결혼해서도, 나는 혼자 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고 종종 혼자 여행도 다닐 정도였다. 너는 너, 나는 나, 각자의 행복도 중요하다며 개인의 행복을 외쳤었다. 그런 내가 남편 출장에 괜찮지 않은 날들을 맞이하다니, 나 조차도 놀랄 일이었다.
_
이제는 괜찮지 않은 날들도 당연히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연습 중이다. 예전에는 괜찮지 않은 날들이 내 인생에 있는 게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 내가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던 시기도 있었다. 나는 무조건 밝고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이어야 한다고 나를 몰아붙였다.
그런 내가 요가를 하고, 책을 읽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를 키우며, 괜찮지 않은 날도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받아들인다. 오히려 그 이후에 감정을 관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이 모든 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해서 생긴 나의 변화다. 이제라도 알아서 정말 다행이다.
_
어제는 괜찮지 않은 날이었는데, 오늘은 괜찮은 날이라서 감정을 글로 남긴다. 어제 괜찮지 않았던 이유는 다음 주 월-금 선호 방학인데, 이선호 아빠는 금요일에 귀국이고, 갑자기 이선호가 아빠를 찾아대서 괜찮지 않았다. 오늘 괜찮은 이유는, 귀국 일정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된 거 방학 때 또 재밌게 놀 걸 찾으면 되니깐. 이렇게 계속 바뀌는 나의 마음이다.
_
이 모든 시간이 우리 가족, 나/슬기찬/선호의 마음 근육을 키우는 시간이 될 것이라 믿으며, 오늘 하루도 나름 알차게 살겠다. 사랑의 힘으로 서로를 응원하며 나아가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