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박물관 방문기 (3) - 도토리와 다람쥐
우리가 오랫동안 배워 온 것과 달리, 백제와 신라라는 강국 사이에서 가야지역이 시달린 기간은 생각보다 짧다. 물론, 각국의 정세에 따라 가야 소국들의 형세가 변동하긴 했다. 한성백제국과 경주사로국이 원삼국시대를 벗어나 정형화된 국가 체계를 갖추고 지방과 중앙 간 수직적인 관계를 맺는, 이른바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전까지는, 가야 소국들 몇몇 역시 될성부른 떡잎으로 보였고, 나름 조금이나마 더 큰 도토리의 지위를 가졌다. 스스로 성장하는 능력은 크게 다르지 않았더라도, 고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주변의 소국들을 자신의 발 아래 놓아야 했다. 친구나 동료가 아니라 부하로 말이다.
한성백제의 시작은 북쪽 유민들이 한강 하류에 터를 잡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마한의 수장국이었던 목지국은 그들에게 "양보"했다. 밀어버리려면 적어도 마음만은 얼마든지 밀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멀리 병사를 보내는 것도 일이거니와, 목지국과 한강유역 사이에 있던 다른 많은 마한 소국들의 동의도 있어야 하는 일이다. 군대의 원정은 또한 많은 군량과 더 많은 훈련, 그리고 농민과 병사를 따로 둘 수 있는 정도의 국력을 요한다. 그렇다고 한성백제를 완전히 아래로 둔 것도 아니다. 서양의 봉건제와 닮았다. 목지국은 목지국이고 백제는 백제였다. 서로 신경을 덜 쓰되 겉으로만 위 아래를 구분하고, 서로간의 침공을 억제하여 각자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물론 그 성장이 너무 적나라하면, 다른 거수국들에 의해 견제받을 수 있다. 기틀을 잡고 다른 거수국들 몇 개를 합친 정도의 국력까지 올리는 것이 급속도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목지국 이남에서도 놀기만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고조선 최후의 왕이었던 준왕 세력이 넘어와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건마국도 있었고, 해상 세력으로 추정되는 침미다례와 해당 지역으로 넘어와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이는 위만조선의 잔존세력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 후기 백제의 시간에서 중요한 호족이자 중요한 거점으로 분한다. 분명한 것은, 그들 각각이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지만, 당대 한성백제와 나란히 세우면, 크기 차이가 확실히 나는 콩알만한 도토리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중요한 것은, 그들은 한성백제와 면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들 또한 도토리의 범주 안에는 있었다는 점이다.
김해 금관국은 사로국 초반 도움요청에 응하고 원군을 보내거나 하는 등 분명 큰 도토리였다.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했고, 풍부한 철 생산량으로 낙랑 대방군에서 왜와 신라로 이어지는 국제 해상 교역로 한가운데서 부를 축적했다. 당연히 주변의 많은 소국들은 금관국과 가까워지기를 원했을 것이고, 이런 과정 중에 금관국은 많은 국제적 명성과 인근 지역의 주도권을 가져왔을 것이다.
함안 안라국은 초기 근거지 외에 현재의 마산 지역으로 이어지는 해안 지역까지 영향력을 넓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게 아니었어도, 낙동강 중상류의 상권을 틀어쥘 수 있는 입지를 가졌고, 하류와 해상의 상권을 틀어쥔 금관국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했을 것 같다. 또한 그들은 낙동강을 건너면 바로 진한의 영역이었고, 남강을 따라가면 섬진강 유역과 가까워진다. 섬진강 유역은 향후 대가야의 영역에 들지만, 동시에 백제가 위세품을 보내며 집중적으로 관리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마한, 한성백제, 신라를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에 안라국이라는 이름을 알리고 국제사회에서 그들이 무엇으로든 의미있는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변한의 국가들 입장에서 제일 안타까운 점은,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같은 시대 사람이라는 점이다. (나이 차이는 좀 되지만, 동시대에 존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게다가 청년 진흥왕이 오히려 노련미가 가득찬 성왕보다 강력했다.) 그나마 위안거리라고 할 만한 것은, 성왕이 진흥왕처럼 군사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점이다. (혹은 그 휘하의 장수들의 퀄리티가 진흥왕의 그것보다 못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신라가 안라국의 원군요청에 응하여 포상팔국 연합을 물리친 후, 지리적으로 가까운 거칠산국과 금관국 등이 위치한 낙동강 하류지역부터 압박하기 시작했다. 금관국이 변한의 대표국이긴 했지만 봉건관계도, 수장국-거수국 관계도 아니긴 했다. 변한 소국은 각자 독립국이었고, 연맹체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역학관계가 흔들리면 새롭게 안정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신라 역시도 새롭게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는 지역이 생기면, 그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에도 그들의 시간이 필요하다. 다행히 그 기간, 즉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후반까지 약 백여년의 기간 동안은 백제도 신라도 변한 지역에 신경을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태풍이 오면 먼저 바람이 세게 분다. 진행방향의 어느 쪽에 위치하느냐가 중요하긴 하지만, 바람과 비가 강타하고 나면, 잠시간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할 정도로 고요해진다. 태풍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여기서 안심하면 큰일이다. 태풍은 계속 이동하고, 이 다음에는 진짜로 강력한 비와 바람이 몰아치기 때문이다. 이 때 어느 정도 수습하고 다음의 더 강력한 폭풍우에 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태풍이 오기 전 모습을 영영 되찾지 못할 수 있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모아서 저장한다. 겨울이 되기 전 충분히 비축해놓지 않으면 동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토리나무는 계절을 그대로 맞는다. 물론, 계절에 맞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겨울이 되기 전 잎을 떨어뜨리고 뿌리를 잘 간수하여 다음 해에도 생장을 지속할 수 있도록 준비하긴 한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 보이는 모습은 단지 겨울을 견디는 것으로만 비춰질 뿐이다. 후대 우리의 눈에 비춰지는 고대 국가들의 행보는, 그들이 물밑에서 뛰어다니며 머리를 싸맸을 시간들은 담고 있지 않다. 단지 변한 국가들은 도토리로 남았고, 삼국시대를 형성하는 국가들은 주변에 떨어진 도토리를 열심히 주워 모아 성장한 다람쥐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도 더 옛날엔 도토리로 보이는 국가들과 다를 바 없었으며, 도토리는 결코 다람쥐가 될 수 없다.
매년 반복되는 계절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준비하기 편하다. 대를 이어 내려오며 몸에 새겨진 대로 움직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재해는 다르다. 동식물이 인간에 비해 자연재해를 느끼고 피해가는 능력은 월등하다고 한다. 그러나 대규모 산불이나 태풍은 그들에게도 크나큰 위협이다. 순간의 판단이 불과 바람의 한 가운데 고립되게 만들고, 그 결과는 대부분 죽음이다. 순간의 판단이 그들의 경험이나 실력이 아니라 오직 우연일 수도 있지만, 결과는 의사결정의 방식을 가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고대 역사는 결과를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벌어졌던 의사결정 과정을 완벽하게 추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조선시대처럼 모든 회의 기록이 문서화된다면 가능하기는 하다.) 금관국이 4세기 중후반에 보였던 의사결정은 참 아쉽다. 초반부터 교역의 중심지에 위치했고, 철의 산지를 갖고 있었고, 철의 제련기술까지 있었다. 낙동강 중상류 지역의 국가들도 철을 금관국에서 거래했을 것이므로 철 거래 시장은 금관국의 건국 초기부터 성대했을 것이다. 마한과 한성백제, 그리고 사로국도 그들 나름의 철광 생산과 기본적인 수요를 충족시킬만한 제련기술은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권의 위상과 국부의 축적은 그 정도로는 택도 없다. 생산을 늘려도 그걸 구입해줄 수요처가 있어야만 한다.
수출로 돈을 벌 정도의 수요는 아마도 중국과 연결된 한사군과 제련기술이 없지만 철의 수요는 남달랐던 왜국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포상팔국의 난이 발생한 시기는 한사군이 고구려에 의해 무너지는 시기 직후이다. 한사군은 원래 중국과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해당 시기 월경지가 되었고, 곧 무너진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건재하던 시절, 이들은 마한과 한성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이들 지역에서 생산된 철을 거래하지 않고 대신 변한지역의 철을 거래한다. 이 때는 금관국의 중반기였고, 가장 부를 많이 축적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좋은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고, 길어야 이삼백년 후, 한사군 멸망과 함께 교역로가 통째로 흔들렸다. 생산과 시장을 늘리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훨씬 어렵다. 수요처는 반쪽이 날아갔다. 갑자기 안라국과 금관국이 변한 소국들 사이 수장의 위치를 위협받고 공격받는데는 저런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국제 관계에서 올바른 의사결정은 매우 중요하다. 다만, 이것을 위해서는 충분한 정보가 필요하다. 의사결정이 필요한 그 시기의 정보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과거부터 쭉 모두 다 필요하다. 나의 의사결정이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으로 다가오고, 그 후 정세가 어떻게 변화할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 지금의 의사결정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금관국은 사로국과 시작이 거의 같았다. 국력을 쌓기에 충분한 환경이었다. 기백년을 지내다가 한사군의 멸망과 함께 첫 번째 시련이 도래했다. 이것은 포상팔국의 전란으로 귀결된다.
포상팔국의 전란 당시 금관국은 신라 혹은 안라의 편이었던 것 같지만 특별히 어떤 액션을 취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포상팔국의 전란이 종료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왜와 연합하여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한다. 신라가 꽤나 급박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에 광개토대왕이 5만 병력을 지원해준 것을 보면 그들의 공격은 꽤나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때까지 금관국이 쌓아온 군사력 역시 당대의 백제나 신라에 비견할 만큼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금관도, 왜도, 신라도, 백제도, 마한도, 그 어떤 다른 변한의 소국들도 기껏해야 도토리, 다 합쳐도 다람쥐 수준이었다. 위나라 및 중원과 맞짱을 뜨면서 성장한, 게다가 군주가 광개토대왕인 고구려의 상대는 아니었다. 금관국의 (실질적으로) 마지막이자 회심의 일격은 이렇게 가루처럼 흩날려졌다. 그리고, 금관국이 이 시기 보여준 스탠스는, 안타깝지만, 가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게 된, 첫 번째 도미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