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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gwoo Kim Apr 10. 2024

눈구름을 찾아 헤메다 (3)

추사 김정희 고택 방문기 (2)

발걸음이 붙잡히다


긴 여행의 일정 초반에는 미리 계획한 일정대로 진행하려는 편이다. 기질적인 특성이라기 보다는, 처음부터 어그러지면 나중에는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벗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순간순간의 변형은 꽤나 즐기는 편이고, 따라서 일정의 계획을 상당히 여유롭게 잡는 편이다. 세종에서 고군산군도로 가는 길에 예산군을 끼워넣는 것은, 누가 봐도 효율적인 루트라고 말하기 어렵다. 너무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 선생에 대해 모른다는 때문에 곳을 번째 기착지로 정하게 되었다. 


추사 고택 근처에 현충사가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과 함께, 이순신 박물관(또는 기념관)이 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 아는 지식의 양과 추사 김정희 선생에 대해 아는 지식의 양은 차이가 있다. 많이 알수록 해당 유적지에 볼 게 많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나만 그럴 수도 있다) 게다가 현충사는 워낙 오래 전부터 알았던 유명(?) 방문지였다. 반면에, 추사고택의 경우 길을 가다가(정확히는 해미읍성 방문하는 길에) 도로상의 이정표를 보고 알게 된 케이스였다. 그렇게 알게 되고 방문할 요량이면 좀 찾아볼 만도 한데, 그 때는 전혀 찾아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냥 고택 하나 딸랑 있는 줄 오해하여 짤막하게 휙 둘러볼 요량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이전 방문기에서 쓴 대로, 이 때는 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그런데 월요일이었다. 월요일은 대부분의 박물관이 문을 닫는다. 적어도 국립박물관들은 거의 모두 그렇다. 박물관 뿐 아니라 국립수목원도 마찬가지다. 분명 한 켠의 박물관을 보았지만, 지레 닫았을 거라 생각하고 그 추위를 뚫고 고택을 먼저 방문했던 것이다. 추위 덕택에 고택을 둘러본 시간은 평소보다 짧았으나, 기념관에서 내 발목이 제대로 붙잡히고 말았다. 


고택의 방문을 마치고 관람방향을 따라 옆문으로 나오면, 멋진 노송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아래 쉼을 주는 벤치가 몇 개 있다. 흰 눈이 소복히 쌓인 너른 구릉에 꽤나 멋있는 모습이어서, 시간이 좀 더 여유롭고 날이 조금만 따뜻했다면 그 곳에서 쉬었다 갈 만한 곳이었다. 


추사고택 옆 노송과 벤치들, 그리고 그 옆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묘가 자리한다. 


묘가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고택은 생가였다. 이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벼슬길에 올랐으며, 말년의 꽤 오랜 기간 동안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숨도 이 곳에 놓아두었던 것이다. 기념관을 먼저 보고 묘를 발견했다면 좋았을 싶었다. 추사 선생이 걸어갔던 길을 기억하며 추모하는 시간을 가질 있었을테니 말이다. 먼저 본 추사고택은 나름의 좋은 시간이었지만 추사 선생의 시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주지는 않았다. 겨울이라 앙상했지만 군락을 이룬 노송들이 바람을 꽤 막아주는 듯 했다. 


추사 기념관 앞에 위치한 추사 김정희 선생의 동상.
추사 기념관 내 첫 전시물. 추사 선생에 대한 일종의 안내문이었다.


추사 기념관?


역사 속 위인들의 생가나 관련 유적지를 가면 으레 1+1 개념으로 존재하던 조그만 박물관들이 있었다. 최소 십오년 전 이야기다(벌써 시간이;;;ㅠㅠ). 아무래도 경험을 바탕으로 예상하다보니, 별 기대가 없던 것이 사실이다. (솔직히 닫혀 있는 줄 알고 화장실도 야외에 있는 곳을 갔었다.) 그런데 그냥 떠나기는 뭐해서 근처에 접근해보니, 열려 있었다. 따로 입장료는 없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여타 국립 역사박물관을 무료로 관람했을 때 만큼, 이걸 돈 안주고 봐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빡빡하고 충실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기념관이라는 표현이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주차장 한 켠(고택 맞은편)에 위치한 추사체험관. 한겨울이라 그런지 닫혀 있었다. 저런 걸로 예산을 충당하는가 싶었다. 


추사 기념관은 추사의 생애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념관 앞에 위치한 추사 고택에 관련한 부분도 따로 전시되어 있었다. 게다가, 추사 선생의 거의 모든 서찰과 글과 문집, 서예 등이 잔뜩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실 벽이 빈틈이 없을 정도였다. 건물이, 전시실이 너무 작은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박물관은 처음이었다. 어떤 곳은 공간은 넘치는데 전시할 게 없어서 양을 채우려 노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박물관도 있는데, 이 곳은 넘치는 유물을 어떻게 하면 예쁘게 효율적으로 다 배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추사고택 모형. 정문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한 칸씩 높아지는 구조다. (위치: 추사기념관)


옛날 옛적(?)엔 책을 파시는 분들이 아파트를 돌아다니면서 책을 팔러 다녔다. 과학책 전집이라던지, 위인전 전집 같은 것이 주요 대상이었다. 위인전도 국내와 국외로 있었고, 한두권 팔아야 돈은 안되고 품만 들테니 보통 최소 열 권 이상의 전집만을 파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그런 책들은 필수 독서 서적에 거의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 가끔 그 해 문학상을 받은 책들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지방 서점에 그런 책이 깔리는 경우는 별로 없었고, 구하려면 서울에 있는 친척 등을 통해 우편으로 부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출판사가 달라도 위인전의 인물이나 과학서적의 주제들은 대동소이했다. 그 때는 서울에서 제일 먼 지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책을 접하지는 못했고, 그렇게 구입한 책들이 내 초기 독서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것 같다. 


한국사에 위인이 한두 명일리도 없고, 저런 위인전집으로 커버할 수도 없다. 삼십여년 전 알려진 위인과 지금 알려진 위인의 수도 사뭇 다르다. 추사 김정희 선생에 대한 내용은, 교과서에 추사체와 금석학에 대해 기술된, 많아야 한두 단락이 다였다. 그 당시 위인전에는 추사 선생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서예를 했다면 좀 알 수 있었으려나 싶은데, 역사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안타깝게도 미술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봐도봐도 잘 모르겠어서 그런 부분도 있긴 한데, 그런 미술쪽 역사 중에서도, 동아시아의 서예, 글씨체 등에 대해서는 특히 더 모르고, 큰 관심도 없어왔다. (내가 악필이라 그런 것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조선이라는 국가의 건국 이념과 국가 체계의 기반은 유학의 한 갈래(?)인 성리학이다. 신진사대부라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유학자이고, 성리학자였다. 유학은 시대에 따라 오랫동안 변화하고 발전해 왔는데, 진나라(*진시황제의 그 나라다)때 발생한 분서갱유로 인해 정말 많은 유학 관련 서적들이 불타면서 기존의 발전 추세가 복구를  위한 노력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백년 천년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유학의 대세는 훈고학에서 성리학으로, 다시 양명학에서 고증학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추사 김정희 선생의 주 분야였던 금석학은, 이 고증학의 한 분야로, 지금의 고고학과 일정 부분 궤를 같이 한다. 굳이 따지면, 고고학의 분야 중 문자에 집중하여 연구하는 역사학에 가깝다고 한다. (*인용출처: 추사기념관 안내문) 


당대 학문의 흐름에서 추사 선생은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청나라에 방문하여 고증학을 이끌던 학자들에게 직접 사사받고 돌아와서 조선 내 고증학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순수비를 복원하고 해독한 것과, 서예로 유명한 줄만 알았는데, 실제로는 당대 학문의 사조를 이끌어 간다고도 할만한 대학자였던 것이다. 또한 갖은 학문이 꽃피웠던, 조선 후기 마지막 명군이라 불리는 정조 치세 때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덕에, 실학을 접할 기회도 많았던 듯 하다. 이 추사기념관은, 추사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소개 뿐 아니라, 나처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이 유학의 발전단계와 내용에 대해서도 꽤 상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텍스트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연관성 없이 키워드만 남는 그런 관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음이 보였다. 


추사 선생의 학문에 대한 요약문. (위치: 추사기념관)


추사 선생은 꽤 오랜 기간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순조 시절은 각종 사화와 권문세족으로 흑화한 사대부들의 견제로 온전하게 관리 생활을 지속하기 힘들었던 시대이다. 마지막까지 조정에서 노구를 불살랐던 사람들도 있지만, 또한 많은 학자들이 각종 이유로 먼 지방에 귀양을 가서 서적 출판 혹은 연구활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추사 선생은 후자에 속했던 것 같다. 널리 알려진 추사체 및 여러 그림들 또한 제주 귀양 시기에 시작됐다고 하니 말이다. 


추사 선생의 제주 유배기에 대한 설명문. (위치: 추사기념관)
추사 선생의 제주도 유배지 모형. 거친 곳이기는 해도 꽤 크다. 방문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했다. (위치: 추사기념관)


서예사에 대한 부분은, 솔직히 이렇게 꼼꼼하고 빡빡하게 정리해 놓은 곳은 처음이었다. 물론, 경북 영주시에 위치한 소수서원을 방문하면, 그 옆에 선비촌이 있고, 그 곳에 박물관이 하나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공사(또는 리모델링?)를 이유로, 상설전시실은 닫고 특별전시실만 열어놓은 상태였다. 그 곳에 서체, 정확히는 현판에 대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각종 현판을 수배해서 전시하고, 시대별 현판의 서체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간략하게나마 그 서체들에 대한 설명을 전시하고 있었다. 상설전시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있었다. 뭔가 잘 보고 나온 느낌은 있었지만, 많이 배운 느낌은 또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곳은, 서예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제한된 공간이지만 어느 정도 흐름을 깨우치기에는 충분한 느낌이었다. 


추사 기념관 내 서예사 전시 첫부분. 여기부터 시대순으로, 한국과 중국 투트랙으로 전시되어 있다. 
설명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서책과 편지 등을 인용하여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치: 추사기념관)


개인적으로 이 기념관의 백미는, 추사의 거의 모든 서신과 개인문집(?)을 전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두가 진품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복제품이라도, 추사 선생 말년의 생각과 글과 말을, 그 서체와 함께 왕창 전시했고, 당연히 그 해석도 함께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전시물들을 양껏 보다 보면, 잠깐이나마 그 내용과 서체가 연결되어 느껴지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냥 서예같지 않아 보이던 추사체는, 고신으로 몸이 상할 대로 상해 바다 건너 제주에 와서, 몹시 거칠고 황량한 제주의 환경에 몸은 적응하기 힘들지만 대학자로서 불평을 적어도 겉으로는 삼키고 감내하던, 그의 감정선이 절제되고 또 절제되어 뿜어져 나온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추사 선생의 많은 서신 중 하나. 제주 귀양기에 본가로 보내는 서찰이었다고 한다. (위치: 추사기념관)


결과적으로, 단순한 고택도, 단순한 기념관도 아니었던 이 곳은, 본 여행의 목적지인 고군산군도에 다 어두워진 후에 도착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실수로 시간을 충분히 배정하지 못했다고 해서, 눈 앞에 잔뜩 놓여진 추사 선생에 대한 충실한 전시를 포기하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 일 이후로, 대형 국립 역사박물관 외에, 지역의 소규모 박물관도 충분히 갈 만 하다는 인식이 생기게 되었다. 연구활동 외에도 평생 교육에 힘쓰셨다더니, 이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게 꼼꼼하게 배움의 길을 여실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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