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가득 차 있는 수레는 조용하다는 말이 된다. 여러 가지 물건들이 빼곡히 실려 있는 수레는 비어있는 틈이 별로 없으니 마구 흔들려도 소리가 별로 안 나는 것이다. 진또배기는 말수가 적고 자기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도 있다. 이삭이 알알이 영글면 머리가 무거워지니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반대로 덜 익은 벼는 알맹이가 작고 가벼워서 꼿꼿이 서있게 된다. 머리에 든 게 많을 수록 겸손하고 신중해진다는 걸 나타내는 훌륭한 비유다.
이런 말들을 보면 사람 사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듯하다. 오늘날의 언어로 이런 현상을 가장 잘 표현한 개념이 더닝 크루거 효과일 것이다.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만,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보통 이런 이미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거 아니라고 한다
더닝과 크루거라는 두 사람이 쓴 논문에는 "무지는 지식보다 더 확신을 가지게 한다"는 찰스 다윈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의 한탄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시대의 아픔 중 하나는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무지한데, 상상력과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의심하고 주저한다는 것이다."
러셀의 명문에서 유일하게 동의하기 어려운 건 "'이 시대'의 아픔"이라는 부분이다. 내 생각에 저런 현상은 이 시대만이 아니라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나타나는 것 같다. 내 주변에만 봐도 정말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
내 동생만 해도 그랬다. 내가 처음 동생의 능력을 발견하게 된 건 동생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였다. 그 무렵 동생은학교 국어 선생님이 만든 교내 독서토론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독서 토론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 국어 선생님의 독특함에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날의 일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그 주의 책이 조지 오웰의 1984였는데 동생이 내게 와서 그날 독서토론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토론의 주제는 1984의 주인공인 윈스턴의 심리에 대한 것이었다.
토론 과정에서 그 주제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나왔는데 편의상 A 해석과 B 해석이라고 하자. A 해석을 주장한 학생은 내 동생이랑 또 다른 학생 1명 뿐이었고 나머지 모든 학생들은 B 해석을 주장했다고 한다.
국어 선생님은 자유로운 토론을 위해 어느 쪽이 더 맞다는 식의 발언은 하지 않으셨지만 동생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의 해석이 맞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전교 상위권의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전부 B 해석을 지지했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 맞는건지 확신이 들지 않아 답답하다는 거였다.
동생이 굳이 내게 이 얘기를 한 이유는 나도 1984를 읽었다는 걸 동생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공부도 잘 하는 편이었기에 잘난척하고 재수없는 오빠긴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믿을 수 있는 의견을 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동의했다는 B 해석을 들어보니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이해는 가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상세히 뜯어보고 작가의 의도를 고려한다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해석이었다. 그런데 동생이 주장했던 A 해석은 조지 오웰이 1984라는 책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소설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듯한 해석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동생은 학교 성적이 그리 신통치 않은 편이었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들은 동생이 공부를 많이 해야하는 진로보다는 직접 발로 뛰고 손으로 작업하는 쪽이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내 동생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완전히 뒤엎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책을 읽고 토론을 할 때 어느 한쪽이 좀더 이치에 맞는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내가 놀랐던 이유는 내 동생이 책 읽기를 정말 싫어했다는 사실, 그래서 글로만 되어 있는 책을 읽어본 게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으며, 1984처럼 두꺼운 책을 읽어본 건 그때까지 단 1권 정도 뿐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력을 감안해서 생각해보면 동생이 그렇게 줄글로 된 두꺼운 책을 한번 읽고 단번에 핵심을 파악했다는 건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전교권에서 놀던 학생들도 잘못 짚었던 논제에 대해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주장했다는 건 더더욱 비범한 일이었다.
문제의 그 책
그때부터 나는 동생에게 이런 저런 책들을 읽어보길 추천했고 진로나 대학 진학에 있어서도 좀더 욕심을 내어보길 권했다. 그러면서 항상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다', '네 독해력은 거의 천부적인 수준이다'라며 부담스러운 칭찬들을 덧붙였다.
동생은 나의 칭찬과 격려를 들을 때마다 기분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오버를 하는 게 아니냐고,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너 자신의 능력을 못 믿겠으면 널 대단하다고 말하는 나를 믿으라"고 말하며 또 기름진 칭찬들을 늘어놓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생은 논술 전형으로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논술 시험장에서 논제를 봤을 때, 이 문제를 낸 교수님의 의도가 선명하게 느껴지고 어떻게 써야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가 눈에 훤히 보여서 일필휘지로 단숨에 쓰고 나왔다고 한다. TV 예능 보는 건 좋아하지만 두꺼운 책은 한권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동생이 논술로 입시에 성공할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지금은 동생도 스스로 만들어낸 객관적인 결과를 봤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충만해졌지만 처음에만 해도 자기의 능력을 끝없이 의심했다. 이미 천부적이라고 할만큼 뛰어난 능력이 있었고 이런 방면에서는 권위가 있다고 느껴지는 오빠가 그렇게 확언하는데도 오래도록 확신을 갖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내 생각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동생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지 않았고 학교 성적도 그저 그랬다. 동네 도서관에서 하도 책을 많이 빌려가서 우수 이용자 상까지 받고 성적은 언제나 전교권에서 놀았던 오빠에게 가려 가족이나 주변에서 칭찬과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동생의 독해력과 논리력은 '학교 성적'이라는 정량적인 지표로 확인받지 못했을 뿐, 동생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 능력이 독서 토론모임을 계기로 처음 수면 위에 드러났을 때, 나도 곰곰히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익숙함에 가려져 그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놓치기 쉬운 법이니까 말이다.
동생의 잠재능력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도록 격려하여 좋은 결과로까지 이어졌던 이 사건이 바로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이기도 하다. 동생이 스스로에 대한 충만한 자신감으로 어려운 일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며 놀랄만한 성과를 보여줄 때마다 마음이 흐뭇하기 그지없다.
(근데 다 쓰고 보니 동생의 사례랑 더닝 크루거 효과가 딱 들어맞진 않는 것 같다만.. 기차에서 글 쓰느라 머리 아프니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가자)
최근에 부쩍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된 고등학교 친구에게서도 이런 현상, 즉 능력이 뛰어난데도 스스로 평가절하하는 모습이 관찰되길래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이 글을 썼다. 네가 공개된 공간에 글을 쓰지 않는 것은 마치 귀중한 유물이 땅 속에만 박혀 있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이다.
너만의 자유롭고 독창적인 생각들을 글이라는 틀 안에 담아 발행하는 것이 마치 무한한 상상력이 깃든 예술작품을박물관의 유리관 안에 가두어놓고 사람들 보기 좋으라고 전시하는 것처럼 답답하고 성가시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거 나도 이해하지만 몇년 전부터 네게 말했던 것처럼 '그래도 쓰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기록되기를 싫어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네 글을 읽고 어디서도 얻지 못할 영감을 얻길 원하는 나를 위해서라도 나는 네가 꼭 글을 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