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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홍구 Apr 03. 2019

시간과 공간의 방을 찾아서

두 번째 방사성동위원소 치료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만화 <드래곤볼>에서는 이런 공간이 나온다. 바로 시간과 공간의 방이다.

등장인물들은 꼭 여기서 모래주머니를 찬다. 유년시절 또래에게 강타했던 모래주머니 열풍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양 옆에 달려있는 모래시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곳은 흔히 '속세'보다 훨씬 느리게 시간이 간다. 때문에 손오공은 여기서 상대보다 긴, 강해질 시간을 얻는다. 그리고 상대를 무찌른다.

신촌세브란스 암병동 904호. 방사성동위원소 치료병실.

나에게도 그런 '시간과 공간의 방'이 있다. 신촌세브란스 암병동 904호. 두 번째 방사성동위원소를 치료 중이다.  손오공과 같은 점이 있다면, 나 또한 수술 후 몸에 남아있는 암세포와 싸우고 있다는 점이다. 차이 점이 있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손오공과 달리 나는 지금 지루하다. 굉장히 지루하다. 한없이 지루하다.



같은 곳 2. 이곳에서 미셸 오바마의 비커밍을 읽었다. 물론 절반밖에 못읽었다.

방사성동위원소 하면 그게 뭐냐. 항암치료 같은 거냐. 머리가 빠지는 거냐는 질문이 줄을 잇는다.

물론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수술 과정에서 미처 제거하지 못한 암세포들을 치료약 속 방사선을 통해 없애는 과정이다. 물론 머리는 빠지지 않는다. 가뜩이나 점점 모발이 귀해지는 시기. 모발, 모발.


중요한 건 (나의 경우) 2박 3일 동안 타인과의 접촉이 전면 금지된다는 점이다. 당연히 팔자에도 없던 1인실을 써야 한다. 심지어 의료진과의 접촉도 해선 안된다. 때문에 식사를 받는 과정도 독특하다. 이중문에서 문 하나를 열고 음식을 가져다주면, 내가 반대쪽에서 문을 열고 들어와 음식을 타간다. 식기도 모두 일회용기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대소변을 보고는 물을 두 번 내려야 한다. 방사선 동위원소가 주로 대소변, 타액 등을 통해 배출되기 때문이다.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구. 간호사와도 호출기를 통해 소식을 전한다.

물론 병실 내 상황을 체크해야 하기 때문에. 병실에는 일부 CCTV가 설치돼 있다. 물론 환자의 동의도 얻는다. 그래도 간호사들이 내 일정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게. 아침에 일어나면 칼 같이 간호사의 호출이 온다. 그렇게 하루에 두세 번 세상과 소통을 한다.

이게 그 CCTV. 지금 이 글을 CCTV 아래서 쓰고 있다.

영화 마션 속 맷 데이먼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자아도취겠지만 인생 사는 맛이 그런 것 아니겠나.


그래도 오뉴월 뙤약볕은 하루하루가 다르다고.

그 잘난 동위원소 치료가 두 번째라도 생각보다 쉽게 견뎌내고 있는 것 같다.

어제는 "환자 네 분 중에서 강홍구 님이 가장 씽씽하네요"란 한 마디에 힘이 불끈 솟기도 했다.

괜히 김보성 빙의돼 허공에 헛 주먹질을 몇 번 더 갈겼다.


물론 시간과 공간의 방이 쉽지만은 않다.

지난해부터 몇 차례 병원신세를 지면서 느낀 건 확실히 나는 좀 쑤신 걸 못 참는다.

여기에 와서도 책을 폈다 덮었다. 유튜브를 봤다 껐다. 팟캐스트를 듣다 말다, SNS를 하다 말다, 브런치를 쓰다 말다, 화장실을 왔다 갔다.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한다. 전날까지 이사 작업으로 피곤할 법한데도 오늘은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나태로움이 부지런함의 눈을 뜨게 하기라도 한 걸까.


다니던 학교의 병원에 입원한다는 것도 묘한 기분이다.

어떨 때는 큰 위로가 돼다가도 어떨 때는 큰 상념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아 다음 문단을 입력하기 전에. 침샘 마사지 한 번 하고. 알약으로 삼키는 방사선 치료약이 침샘에 남아 세포가 손상될 우려가 있으므로 주기적으로 침샘을 마사지해줘야 한다. 2시간 단위로 레모나를 챙겨 먹어야 하고, 또 신 음식도 될수록 자주 먹어주는 편이 좋다. 물론 물도 많이 마셔야 한다.)


역시나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건 야구다.

한동안 배구에 흠뻑 빠져. 소홀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구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마치 "너 그럴 줄 알았어"라는 듯.


특히나 이 곳에선 야구가 큰 힘을 발한다. 일단 기본적으로 시간이 길고. 이닝별 휴식시간을 틈타 이것저것 하기에도 좋다. 경기가 소강국면에 다다르면 잠깐잠깐 책을 읽거나 하기에도 좋다. 게다가 오전에는 메이저리그, 저녁에는 KBO 리그. 하루에 두 차례나 나를 위로해주니 어디 또 이만한 벗이 있으랴. (그런 의미에서 야구 시간 단축 같은 논의는 나오지 않았으면 싶다. 야구에 있어서만큼은 나는 수구꼴통인지 모르겠다. "아무렴 야구란 그런 맛이지")


난데없는 친구의 개인 톡도 큰 위로가 됐다.

"다음 주에 커피나 한잔 하자"만큼 또 황홀한 약속이 어디 있을까.

 

오전에는 MLB
저녁에는 KBO


지난 이틀간 그랬듯 다시 간호사 호출기를 통해 그의 호출이 들려오면
나는 짐을 챙기고, 옷을 갈아입고 저 문을 열고 나가리라.


우선은 4월의 맑은 하늘 아래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싶다(비록 미세먼지로 가득할 지라도).

그리고 오늘은 평소 연락해보지 않았던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보고 싶다. 그런 아름다운 날씨다.

돈주고 사서보려면 꽤 쳐줘야 할 병실의 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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