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홍구 Mar 30. 2019

있는 힘껏 이해한다는 건

아, 그러니까 이건 소파에 관한 이야기

앞서 책장에 이어지는 이야기다.

독립을 함에 있어 가장 공을 들였던 게 책장이었다면.

가장 고민을 많이했던 건 단연 소파였다.


책장부터 침대, 식탁 할 것 없이 제법 과감하게 선택을 했음에도

소파 앞에서 나는 흔들리는 갈대가 되고야 말았다.


책방이 독립의 시작이었다면,

안락한 1인용 소파는 독립생활의 마침표같다고 느꼈던 걸까.


신혼집 집들이를 가면 거실에 근사하게(다소 거만하게) 들어누운 리클라이너부터

치과 진료 의자를 연상케하는 의자까지

이를테면 이런식. 지금보니 굼벵이 같다.

총 4개의 소파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보는 사람마다.

"야야야야. 이것 좀 봐봐" 하는 말로 마뜩잖아 하는 그들을 불러세웠다.

(이 자리를 빌어 심지어 소개팅녀에게도 "이거 이거 이거 있잖아요."

라고 이미지창을 넘긴 적이 있노라 고백한다. 아멘. 성불하소서)


그렇게 마음을 바꾸기 여러 번.

한 차례 주문이 품절로 취소되는 해프닝이 있고 나서야

나는 지금의 내 소파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바로 요놈. 이케아 스트란드몬 다크그린.

 한 켠에 떡하니, 리클라이너보다 더 거만하게 눌러앉은 놈을 보니 마음이 더 뿌듯하다.

실은, 주변에 "이것좀 봐봐"를 반복했던 이유는 어쩌면 "그래 소파는 단연 이거지"라며 내 마음 속 0순위의 정당성을 재확인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첨부터 마음에 든 건 이거였으니까.

고민 끝에 놈을 떡하니 마주하고 보니.

불현듯 후회가 스쳐지나간다. 식탁도, 침대도, 책상도 실은 마음에 드는 녀석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써. 그들을 못 본 체 했던 게 아닐까. (실은 테이블은 다시 바꾸는 해프닝이 있기도)

결국 내 마음은 내가 제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당연한 소리)


문득 최근 이해에 관해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이를테면 동병상련.

회사에 나와 같은 수술(갑상선암)을 한 선배가 있다. 브런치를 재개하는 데 큰 용기를 준 선배이기도 하다.

입사 시험 때부터 담당자로 만났고, 또 같은 팀에서 일을 한 연도 있어서 알게 모르게 의지해왔던 선밴데

최근에 같은 수술을 받고 나서 만난 선배와의 대화는 좀 더 특별한 느낌이었다. 뭔가 서로를 속속들이 이해한다는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니 그랬다. 사실 나도 대학병원 의사의 확진 진단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건 부모도 형제도, 친구들도 아닌 일 년에 얼굴 한 번 볼까말까한 아는 동생(그녀도 같은 병)이었으니까. 실제로 나는 갑상선암 진단을 받자마자 그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알고보니 그 선배도 확진 뒤 나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구글에서 갑상선이라고 검색했을 때 나오는 이미지. 그녀와 그녀가 준 용기 덕에 나는 이 단어를 비로소 볼 수 있게 됐다. 고마움을 전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이해란 같은 것을 공유하는 것일까?


라고 훈훈한 생각을 하려는 찰나에

단톡방 친구의 한 줄이 내 등짝을 후려친다.


"근데 그건 또 아닌 거 같은 예시가 같은 경험을 하는 직장 동료들 사이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아(원문을 그대로 옮겼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긴 단꿈에서 깨어난 듯. 아, 그래 그거 아니지란 생각이 불쑥 든다.

따져보면 정말 그렇다.


사실 따져보면

연인 사이의 잦은 다툼도 어쩌면 '이해'의 부족에서 시작되기도 하니까.

(그 이해가 어떤 이해였던지 간에. 뭘 어떻게 이해하라고 뭘. 도대체. 왜)


하긴 산타도 우는 아이는 쏙 골라놓고 선물을 준다고 하니.

어디 이 세상에 온전한 이해라는 게 존재하나 싶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 소파는 완전히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쩄든 휴가 시작.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과 공간의 방을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