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홍구 Dec 11. 2019

I wish my merry christmas

크밍아웃

12월의 토요일 어느 밤.


무엇에 홀린 듯 나는 걷고 있었다. 신촌 너머 학교 깊숙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반짝이는 그것이 나를 유혹했다. 목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속으로 사람이 너무 몰려 있으면 어쩌지라고 고민했다. 앞선 이들이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걷는 듯 느껴졌다. 자꾸 조바심이 났다. 기우였다.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선 나는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다시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트리 앞 벤치에 걸터앉았다. 설마 트리 때문에 이 곳까지 기어들어 온 건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벤치 너머 연인들의 밀어가 들리는 듯 마는 듯. 애써 휘파람을 불었다. 인적이 뜸해진 찰나, 숨 죽여 꾹 동영상 버튼을 눌렀다. 이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트리 주변 한 바퀴를 돌았다. 설레는 마음을 꾹 눌러 담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나의 이 크리스마스 성애는 어디서 온 걸까.

월, 수, 금 전화영어를 걸어오는 매디슨의 질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내게 크리스천이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이건

크밍아웃에 관한 이야기다.


진짜 산타? 의 존재를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쩜 그렇게 내가 원하는 레고를 따박따박 사다 주는 걸까. 에서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던 것 같다.


막상 낭만적인 기억도 얼마 없다.

스무 살. 동네 녀석들과 맞이한 이브에는 노래방에서 옆방 무리와 시비가 붙었다. 친구 녀석은 어디서 났는지 각목을 들고서는 내내 설쳤다. 노래방 어디서 각목이 나온 건지 아직까지 미스터리다. 때문에 나는 상대 무리가 아닌 그를 막아서야 했다.


연인과 맞이한 첫 이브에는 수습 하리꼬미를 시작했다. 그 브라운아이드소울의 그 VIP 티켓을 끊고도, 정작 그녀의 친구에게 양보해야 했다. 늦은 밤 가까스로 그녀를 만나고도, 나는 쏟아지는 잠을 못 이겨 카페베네 테이블에서 졸았다.


소개팅녀와 함께 본 라라랜드 데이트는 그날로 마지막이 됐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태어났다는 H 첫겨울을 함께 맞이하기 전 떠나보내야 했다. 글로 쓰고 보니 더욱 애처롭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했다.

나의 크리스마스 성애는 어디서 온 걸까.


거창하게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요새 몹쓸 셀프 교훈병이 생겨서 되지도 않는 메시지를 짜내는 버릇이 생겼다.


무엇보다 캐롤 때문인 것 같다. 학창 시절 나는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에게 캐롤을 허했다. 그래서일까. 캐롤은 나에게 연말 특유의 훈훈함 만큼이나 해방감을 주는 것 같다. 이를테면 모든 게 용서받을 것 같은 그런 기분.(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부블레의 캐롤을 추천하고 싶다. 텔미 콴도 콴도 콴도)


아니, 실은 크리스마스 카드 때문인 듯 하다.

유일하게 카드 교환이 합법인 계절.

오가는 카드 속에 담긴 단어들을 기다리는 게 즐겁다. 학창 시절 2분단, 3분단의 손을 거쳐 4분단의 짝사랑에게 보낸 그 쪽지의 답장을 기다리던 심정으로. 아주 목이 빠져라.


광화문 교보문고 통로를 가득 메운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어떤 단어, 어떤 사연들이 빼곡히 채워질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전에 내가 보낼 단어들을 생각한다.


서재에 고이 모셔둔

크리스마스트리가 번쩍-하고

나를 비웃는다.


혹여 원하시는 분들이 계시면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I wish my merry christmas








매거진의 이전글 사회인 야구인에게 홈런을 친다는 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