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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슬리 보홀 Oct 23. 2016

<월간 보홀> 10월호

#미루면 보이는 것들

#미루면 보이는 것들


 가끔 너무 선명해질 때가 있다. 매일 반복되는 순서대로 움직이고 생각하고 먹고 잠에 들지만 갑자기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것이다. 그 선명함 속에는 그동안 생각지 못 했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중요한 일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아아, 지금이라도 생각나서 다행이야 하고 미뤄둔 일을 처리하면 다시 이어지는 생각과 행동은 평소와 다르게 모든 감각들이 깨어있다. 그리고 그동안의 내 습관과 말과 행동, 생각의 주름이 곧게 다림질되어 깨끗하게 펴진다. 그럴 때면 나는 그동안 묵혀 왔던 고민과 걱정들이 정말 간단한 문제라는 걸 깨닫는다.



 그때 나는 무언가 하나씩 시작하거나 멈추길 반복한다. 갑작스레 담배를 끊기를 했고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기도 했다. 오래 쉬었던 운동을 시작하고, 조금 더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해지길 노력하기도 한다. 물론 더 이상 의미 없는 인연을 정리하기도 했다. 어떻게 그동안 잊거나 익숙해진 일들을 한순간에 바꿀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동안 필요했거나 필요하지 않은 일을 미뤄뒀기 때문이다. 그런 선명함은 어느 날 갑자기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찾아오기도 하고 책이나 영화를 보고 영감을 얻었을 때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사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살아온 게 아닌가 싶은 정도다. 못된 버릇처럼 선명한 감정과 정신이 생길 때 밀린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문제의 주변을 의식하며 일상을 반복할 뿐.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와 여행 중에 보홀에 머물기로 결정한 것도 이런 선명해지는 순간의 힘을 빌렸다. 사실 이런 결정들을 오랜 시간 계획하고 천천히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보일 법도 하지만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저울질하며 결정하는 과정의 연속은 늘 ‘데드라인’을 넘기 직전이었다. 그렇듯 이런 나의 선명함은 보통 마감을 앞두고 이루어진다. 어떤 문제를 끌고 끌어서 이제는 결정하고 실행으로 옮겨야 하기 직전에야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우린 살면서 늘 결정하거나 마무리해야 할 일들에 둘러싸여 있다. 업무적이든 내 삶의 문제든 누군가의 약속이든 어느 상황에서도 적용되는 데드라인. 나의 경우 지금까지 데드라인 직전에 생기는 순간적인 선명함에 많은 것을 의지했다. 어렸을 때부터 방학 숙제를 개학 전날에 몰아서 하길 시작했고 대학생이 돼서도 과제는 마감 전날에야 시작해서 밤을 새워 끝낸다. 공모전도 그랬고 취업을 위한 자소서를 쓸 때도 마감날에야 입사 지원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나의 모든 글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그동안 나의 삶은 미루기의 연속이다. 미루다 보면 마감에 가깝게 되고 나는 그때야 선명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꽤 괜찮은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 시간의 압박 속에서 나는 좀 더 긴밀하게 생각했고 모든 감각을 깨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감이 정해져야만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습관은 여행 중에도 같았다. 미리 계획을 정해 여행하는 편이 아니라서 하루하루 머물 곳을 미리 정하지 않았다. 현지에 도착했을 때 발품을 팔아 알아보는 식이다. 며칠 전이라도 머물 숙소를 정해 뒀다면 같은 가격에 비해 더 훌륭한 잠자리를 가질 수 있었음에도 결정의 순간까지 나는, 끌고 또 끌 뿐이었다. 여행 중 미루기의 연속 속에 나는 후회할 때도 기뻐할 때도 있었다. 오로지 운의 맡긴다는 건 핑계일 뿐 사실, 고질적인 미루기의 습관 때문이다.



 올해 초부터 <월간 보홀>을 시작하면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굳이 월간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도 매달 마감을 정하지 않으면 몇 번 쓰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동안 감당하기 어려운 글을 썼다. 여행하며 생각한 주제들에 대한 생각을 모으고 괜찮은 단어들로 그 간극을 채우는 일이지만 스스로 정한 마감이 다가올수록 나는 힘들어했다. 그리고 늘 마감 직전에야 조금씩 글을 쓸 수 있었다.



 이처럼 마감이 있는 일들을 어떻게든 마무리하는 습관은 내가 삶을 살아가는데 적용됐다. 물론 이런 습관 때문에 그동안 놓친 것들도 많았다. 미리 계획적으로 준비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었을 것이고 누구보다 앞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쉽지 않다. 조금 더 미리, 계획적으로 준비하는 것.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지금도 데드라인을 앞두고 힘겹게 글을 쓰는 나와 마주한다. 그리고 결국 마감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매달 글을 쓰기로 마음먹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장애물을 건넜는지 모른다. 퇴근 후에 마시는 맥주 한 잔도 멀리하고 즐겨 보는 영화나 미드도 보지 않는다. 그리고 노트북을 켜고 책상에 앉는다. 하얀 바탕에 커서가 반짝거리지만 난 한동안 한 글자도 쓰지 못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인터넷을 켜고 뉴스를 보거나 음악을 듣고 위키 백과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도 못할 때도 많다. 마감 전 일주일 동안 이런 행동을 반복한다. 그리고 결국 마감을 앞두고 선명해지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동안 글의 주제만 생각했을 뿐 한 문장도 시작 못했지만 그 순간 나는 그동안의 생각들을 빼곡히 적을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까지 미루기의 삶 속에서의 결과는 지금의 나다. 이런 습관 때문에 좋은 기회도 여러 번 놓쳤고 죄책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이든 미루지 않았다면 확실히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습관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바꿀 수 없는 내 천성일 지도 모른다. 이런 태도는 그동안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최선의 결과를 만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최선일까. 물론 앞으로도 언제까지 끝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난 마감 며칠 전에야 시작하는 시늉을 할 것이다. 선명해지는 순간이 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또 다른 무언가에 빠져 빈둥대겠지만 사실 계속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감일까지 해야 할 일을 미루며 조각난 생각들이 모였을 때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이다. 그때야 나는 스스로의 숙제를 끝내며 당분간 해방감에 빠지겠지만 다음의 마감을 위해 미룰 일들을 만드는 반복의 삶.


 아마 당신도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중 일수도 있다. 하지만 상관없지 않은가. 어차피 당신도, 나도 마감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을 마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누군가는 그래도 괜찮다고, 사는 게 그렇다고 말해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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