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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RAVEL Sep 27. 2018

지구에서 가장 비싼 한 접시

ARTRAVEL VOL.30

지구에서 가장 비싼 한 접시

아트래블 편집부


                          

한국 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온 할머니는 명절이면 고향 신의주 음식이 많이 그립다고했다. 그 중에서도 고기가 잔뜩 들어간 녹두전이 유독 먹고 싶다고. 남한에 와서도 명절이면 녹두전을 해먹었지만 고향의 맛은 아니란다. 할머니는 서울 고기로는 그 맛이 나지 않는다 했다. 녹두전 이야기와 항상 곁들여 나오는 말은 고향에 두고 온 할머니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였다. 녹두전의 맛이 달랐던 건 함께 먹는 사람이 달라져서 일지도, 혹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입맛을 바꾸어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에 담긴 이야기는 재료나 요리사의 솜씨 외에도 많다. 같은 음식도 어떤 이에겐 그리움이 되고, 또 어떤 이에겐 새로운 설렘이 된다. 수십 일을 여행하는 것보다, 그 지역의 음식 한 접시를 맛보는 것이 더 커다란 여행이 되기도 한다. 녹두전을 먹으며 어린 시절 할머니의 명절을 상상할 수 있던 것처럼. 어쩌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더 자유로운 상상의 여행은 음식을 맛보는 일이다. 돈이나 재료의 희소성을 떠나 어떤 요리는 그속에 담긴 사연으로 인해 한없이 귀하고 소중한 한 접시가 된다. 금보다 비싸다는 샤프 란이나 왕이 받았다는 12첩 반상에 비할 바가 아니다.



                            

평범한 음식의 통쾌한 반격                                 

CouscousㅣNORTH AFRICA



J. R. R 톨킨의 동화 「호빗」은 출간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호빗이라는 소인족이 세계를 구하는 내용의 동화. 주인공 호빗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영웅 캐릭터다. 엄청난 능력자들이 우글거리는 세계에 살아가는 작은 인간. 특출난 능력이라곤 고작 몸에 비해 큰 발을 이용해 소리없이 걸을 수 있는 것이 전부다. 이 작고 여린 존재가 온갖 난관을 헤쳐가며 결국 세계를 구원할 때, 독자들은 환호했다. 호빗은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캐릭터였다. 동화를 읽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은 쉽게 호빗에 감정이입 됐다. 그러니 호빗의 승리는 비범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이 세계에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승리였다.



북아프리카에도 호빗처럼 지극히 평범한 영웅이 있다. 호빗과 다른 점은, 이 영웅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북아프리카의 영웅은 대단할 것 없는 음식- 쿠스쿠스. 세몰리나라고 불리는 작은 파스타를 쪄서 만든 음식으로 겉모양은 볶음밥을 닮아있다. 11세기부터 북아프리카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었다고 전해진다. 북아프리카에서 매일 적어도 한끼 정도는 먹는 음식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쌀밥같은 것. 이 별 것 없어 보이는 음식 쿠스쿠스 북아프리카 사람들 마음에 영웅이고, 자부심인 것이다.


북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 유럽대륙과 매우 가깝다. 많은 북아프리카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혹은 더 좋은 삶을 위해 유럽으로 이민을 간다. 북아프리카인들의 이민 역사는 이미 1,000년을 넘었다. 이민의 역사는 민족과 인종 갈등의 역사와도 궤를 같이 해왔다. 이민자와 유럽인들 사이의 갈등은 종교에서 극에 달했다.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은 대부분 아랍계 무슬림이었다. 당시 유럽은 기독교가 대세였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서로를 배척해왔으니, 그 갈등의 골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유럽에서 무슬림에 대한 차별은 극심했다. 사실, 여전히 남아있다. 수많은 유럽 문학에서 아랍 무슬림은 악역으로 등장했다. 심지어 알베르 카뮈 같은 진보적 문학가의 소설 「이방인」에서 조차 아랍계 무슬림은 악인이다. 유럽인들의 인식 속에 무슬림은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악한 아랍계 무슬림은 피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 당시 유럽인들은 심지어 아랍계 무슬림을 차별하는 대표적인 문장에 '쿠스쿠스'를 넣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저 사람한테 역겨운 쿠스쿠스 냄새가 나." 마늘 냄새로 차별 받았던 한국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이 말이 얼마나 기분 나쁜 언어인지. 쿠스쿠스는 인종차별적 문장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인종차별하는 사람들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난관이 닥친다. 쿠스쿠스가... 맙소사! 너무 맛있는 음식이었던 거다. 쿠스쿠스를 먹으면 놀림 받을게 뻔하지만,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이국적이면서도 고소한 맛이 중독성이 강했다. 유럽 곳곳에 쿠스쿠스 전문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은 쿠스쿠스가 섬의 대표 음식이 되어 버렸을 정도. 북아프리카의 가장 평범한 음식 쿠스쿠스의 예상치 못한 일격. 더 이상 쿠스쿠스 냄새가 난다는 말은 인종차별적 언어가 되지 않는다. 유럽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가 되어버렸으니. 자기 얼굴에 침 뱉기가 되기 딱 좋은 것 아닌가.


그 반격이 쿠스쿠스여서 특별하다. 대단한 음식이 아니라, 평범한 음식이니까. 누구도 쿠스쿠스가 차별적 언어 하나를 불식시켜 버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쿠스쿠스는 그렇게 통쾌한 반격으로 영웅이 된 음식이다.






유독 튀긴 닭이어야만 하는 이유

ChickenㅣUSA



"오늘 밤에는 치킨을 무조건 먹어야겠다." 이런 다짐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친구들에게 휴대폰 메시지를 하나씩 보낸다. 오늘 치킨을 함께 먹자고. 그런 날이 있다. 일이나, 사람이 유난히 힘들었던 날. 그럴 때면 하루를 보상받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한다. 치킨 한 마리를 시켜 친구들과 함께 먹는 것도 그 중 하나가 된다. 이상하게도 치킨이어야만 하는 날이 있다. 왜일까? 어쩌면 그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모른다.



이 이야기는 18세기 미국 남부의 어느 농장에서 시작한다. 1865년 노예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미국에서 노예는 합법적인 것이었다. 그 기간 동안 미국 남부 농장주 대부분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싼 값에 남부 농장주들에게 팔렸다. 농장주 입장에선 이만한 이득이 없었다. 평생 임금을 지불해야할 이유도 없고, 좋은 작업환경을 마련해 주어야할 의무도 없었다. 당시 미국에서 노예는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예로 팔려온 사람들의 생활 환경은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이었다. 특히 음식에 관해서 더욱 그랬다. 노예들은 주인집에서 먹고 남은 음식이나 식재료를 이용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어쩌다 돈이 조금 생겨 외식을 하려해도, 흑인을 받아주는 식당이 없어 쉽지 않았다. 미국인들이 보편적으로 먹던 음식을 맛본 노예는 극히 드물었다. 어쩔 수 없이 자신들만의 식재료를 이용한 요리를 개발해야 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닭을 오븐에 구운 요리를 즐겼다. 이때 살이 많은 부위만을 사용했다. 목이나, 날개 같은 부위는 버렸다. 주인집의 요리도 대부분 노예가 했는데, 닭 요리를 할 때면 버려지는 부위를 집으로 가져가곤 했다. 그러나 뼈가 많은 부위들이었기에, 풍족하게 먹을 수는 없었다. 이 부위들을 조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 고온의 기름에 튀겨내는 것이었다. 뼈 속까지 바짝 익혀 뼈째 먹기 위함이었다.


고온의 기름에 튀기는 요리 방식을 딥 프라이(Deep fry)라 불렀다. 익숙한 이름이 이제 등장한다. 프라이드 치킨. 고된 노예 생활에 고칼로리 프라이드 치킨이 주는 위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큰 것이었으리라. 사람들은 미국 남부 흑인들이 노동의 고통을 잊기 위해 지어 부른 음악을 소울 뮤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하루를 위로해주던 프라이드 치킨에겐 소울 푸드란 별명이 붙여졌다.


이제야 유독 프라이드 치킨이어야만 했던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태생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하루를 모두 위로하는 음식, 이제는 그 누구의 소울 푸드도 아닌 모두의 소울 푸드가 된 프라이드 치킨의 이야기다.





                       

달빛 아래 일탈 한 모금

MoonshineㅣUSA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가면 이런 친구들이 꼭 하나씩은 있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가방 구석에서 소주 한 병을 옅은 미소와 함께 꺼내 놓는 친구. 고작 초록빛의 병 하나였다. 방 안에 모인 학생들이 한 잔도 안되는 양의 소주를 앞다퉈 맛봤다. 그때 마신 반 모금의 소주 맛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른이 된 지금 한잔 소주는 마신 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그랬다. 반 모금의 소주로 느낀 해방감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20세기 초 미국에 금주법이 시행됐다. 이름 그대로 술을 마시는 것 그 자체가 위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금주법의 시초는 19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절주 운동'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상품들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른 문제들이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가 알코올 중독이었다. 시중에 판매되는 술은 많아졌고, 가격은 내려갔다. 고작 몇 센트짜리 동전 몇 개로 사먹을 수 있는 음료가 된 것. 더구나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가난한 노동자들이 술에 의존했다. 거리로 술에 취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고자 벌어진 운동이 유럽의 '절주 운동'이었다.


당시 미국의 지도층은 유럽보다 더 보수적이었다. 미국 정부는 절주 운동보다 더 강력한 제재를 가하기로 결심한다. 1919년. 미국 연방의회는 금주법을 시행하기 위해 개헌까지 단행한다. 얼마 뒤 금주법이 시행됐다. 가정에서 제조하는 소량의 과일주를 제외한, 모든 상업적 양조장과 증류 공장에서 생산된 술의 판매가 금지됐다. 그 뒤로 13년간 미국의 마트에서 술을 볼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술이 어디 단순한 음료였던가. 한 모금으로 하루를 모두 위로 받는 사람도 있고, 친구에게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도 이만한 동력이 없다. 당시 미국 사람들도 그랬다. 술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종류의 음료가 아니었다.


미국 국민들의 불편함을 기회로 삼은 이가 있었다. 시카고의 전설적 갱단의 보스이자, 마피아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 알 카포네. 그는 금주법을 가장 교묘하게 이용한 인물이다. 잼 생산 공장으로 위장한 주조장을 이용해 술을 제조하고, 판매했다. 술을 숙성시키는 오크통에 술과 함께 과일을 넣어 보관했는데, 이는 잼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위장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위장을 위해 넣어둔 과일들이 술과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맛을 내는 위스키가 된 것이다. 과일은 과즙을 밖으로 낸 대신, 온 몸에 술을 머금었다. 그 맛이 워낙 강렬해 알 카포네는 이 술을 상품화해 팔기로 한다.


이렇게 탄생한 술이 바로 문샤인이다. 달밤에 몰래 옮기는 술이라서 붙인 이름이었다. 이름을 직역하면 달빛이지만, 영어 사전에서 문샤인은 '밀주'라는 뜻을 가진다. 당시 가격은 한 병에 90달러. 한 상자의 제조 원가가 20달러 정도였으니 엄청난 폭리였다. 그럼에도 미국의 뒷골목에선 문샤인이 불티나게 팔렸다. 미국인들에게 문샤인 한 모금은 술 이상의 무엇이었다. 이를테면, 국가적 금기를 어기며 얻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였다.


시카고 뒷골목에서 문샤인을 한 잔 마셨다. 가게에선 재즈가 흘러나왔고, 하늘에선 달빛이 새어 나왔다. 짜릿한 술 맛에 취해, 어쩌면 이 정취에 취해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밤이었다. 이 절정은 학창시절 소주 반 모금을 입에 머금고 느낀 그것과 닮아있었다.






인간이 인간임을 긍정하고 싶을 때

TrippaㅣITALY


몇 년 전, 한국 청년들 사이에 편의점 음식을 이용한 요리가 유행했다. 고기가 들어간 삼각김밥 두어 개를 팬에 올려 고추장을 더해 볶은 음식 같은 것이었다. 청년 실업이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기 시작했던 시기. 자취하는 청년들의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생긴 음식 문화였다. 사실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아니, 가끔은 훌륭했다. 비록 편의점에서 몇 백 원 주고 산 삼각김밥이었지만, 팬에 볶는 순간 근사한 볶음밥이 됐다. 온라인에는 더 맛있게 요리하는 방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회는 청년들이 밥 한끼 마저 걱정하게 만들었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위해 끝없이 고민한 결과였다.


이탈리아에도 비슷한 음식이 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끝없는 고민이 탄생시킨 요리- 트리파다. 트리파는 로마식 소내장 요리다. 트리파를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소의 내장을 찬물에 불려 불순물을 빼 주어야 한다. 다음에는 끓는 소금물에 담가 삶아 비린내를 제거하고, 팬에 올리브유와 야채, 화이트 와인, 토마토소스를 넣어 함께 볶아 낸다. 만드는 과정만 놓고 보면 그리 특별한 음식은 아니다. 전형적인 이탈리아 요리법을 사용하고 있고, 접시에 담아낸 모양새도 여느 이탈리아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요리에 대체 어떤 고민이 담겨 있을까.


오래전 로마 제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로마 제국은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다. 로마는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진 나라였다. 로마의 부자들은 매일 저녁 수십 가지의 음식이 차려진 만찬을 즐겼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의 질과 양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반면, 로마에 살지만 로마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로마에 노예로 팔려온 사람들, 이민자들. 즉, 로마에 사는 이방인들이었다.


로마에선 로마 시민권의 유무가 삶의 질을 결정했다. 시민권자에게는 투표권, 공직에 나갈 권리, 로마 정규군에 지원할 수 있는 권리, 면세권, 재산권 등이 주어졌다. 참고로 세금은 당시 식민국가에서 걷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에게 세금을 낼 의무를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로마에 사는 이방인들은 세금을 내면서도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러니 로마에서 이방인의 경제사정이 좋을 리 없었다.


시민권이 없는 이방인 대부분은 빈곤층이 됐다. 당시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1달란트였는데, 하루치 방세가 평균 1달란트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음식을 해먹는다는 것은 노숙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다만, 가난하다고 아무거나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도 없었다. 부자들이 먹지 않는 소의 내장을 싼 값에 구매했다. 그리고 가장 로마스러운 방식으로 소의 내장 요리를 만들었다. 비록 재료는 버려진 소의 내장이지만, 조리 방법만큼은 로마식으로 함으로써 자신이 로마인과 같은 권리를 부여 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스스로 확인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요리가 트리파다. 로마 사회는 이방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했지만, 스스로 자신이 동등한 인간임을 긍정하는 요리. 그 어떤 음식보다 당당하고 인간다운 요리다.






독일 김밥 집

김밥ㅣGERMANY


독일에는 유난히 한식당이 많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코리안 타운만하진 않지만, 독일의 큰 도시에선 한식당을 어김없이 찾아볼 수 있다. 독일의 어느 한식당에 들어서 김밥을 한 줄을 시켰다. 독일까지 가서 먹는 것이 고작 김밥 한 줄이었다. 물론 맛은 한국에서 먹는 것만 못하고, 비싸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독일에서 먹는 김밥이 한국인에게 분명 특별한 것이라 믿었다. 이 이야기는 약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20여년에 걸쳐 약 1만 9천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독일(당시 서독지역)로 파견됐다. 대부분 남성은 광부, 여성은 간호사였다. 독일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한국에서 같은 일을 했을 때 받는 임금에 5배가량을 받으며 일을 할 수 있었다. 독일 정부는 파독 노동자들의 자녀에게도 무상교육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런 급여수준과 교육복지가 파독 노동자들의 마음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파독된 한국 광부와 간호사는 가장 까다로운 작업 현장에 투입됐다. 광부의 경우에는 대부분 가장 깊고 어두운 막장에서 작업해야 했다. 지하 1,000m에서 하루 8시간씩 일해야 했던 것이다. 간호사에게는 시체를 닦는 일이나,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이 주어졌다. 고된 노동이 끝이 아니었다. 파독 노동자를 더 힘들게 했던 건 차별적 시선이었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평생 받아보지 못한 시선과 외국인 노동자라는 낯선 정체성. 이런 것들을 고스란히 파독 노동자들이 겪어내야 했다. 재독 교포 모임인 '글뤽 아우프'에서 발간한 책 「파독광부 30년사」에 따르면 총 117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사망했는데, 그중 광부 4명과 간호사 19명은 자살이었다. 육체적 고통 그 이상의 어려움을 분명 겪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에서 일하던 한국인 노동자들의 위안은 김밥이었다. 김치와 같이 냄새가 심한 음식을 먹으면 어김없이 놀림을 받아야 했기에, 그들이 찾은 유일한 대안이 김밥이었던 것이다. 광산의 가장 깊은 곳, 병원의 가장 외진 곳, 그곳에서 먹는 한 줄 김밥은 배고픔을 달래 주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한 줄 김밥은 고단한 노동시간에 주어진 잠시의 휴식이었으며, 외로운 타지 생활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언제 갱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하루 종일 느끼며 점심마다 탄가루가 섞인 한줄 김밥과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조정래 「한강」 중에서




글│아트래블편집부

사진│아트래블편집부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www.artrav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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