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TRAVEL Sep 20. 2018

배낭의 무게

ARTRAVEL VOL.31

배낭의 무게

볼리비아 | 최요셉


ⓒ 최요셉

                          

무겁다. 고작 한 달간 떠나는 주제에 챙길 건 왜 이렇게 많은지 뺀다고 빼는 중인데 좀처럼 무게는 줄어들지 않는다. 나는 지금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나라, 볼리비아 뽀꼬뽀꼬에 있는 가족들에게 가족사진을 찍어주러 가기 위해 짐을 꾸리는 중이다. 배낭 하나로는 턱도 없을 것 같아 캐리어까지 꺼내들었다. 평소 여행 관련 책을 읽을 때마다 책 속의 그런(?) 여행자가 되기를 꿈꿨다. 공항에서 노숙을 하고, 며칠에 한번 씻고, 늘 같은 옷을 입으며 자그마한 배낭 하나만 매고 고민거리 하나 없이 감성이 철철 넘치는 글을 쓰며 세계 이곳저곳 떠도는 여행자 말이다. 책 속의 그들이 멋져 보였다. 좋은 숙소에서 자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엑티비티를 하는 여행보다 더 멋져 보였다. '나도 다음 여행 때는 이렇게 여행해봐야지'라고 다짐하고 다짐 했건만 첫걸음부터 실패다. 큰 맘 먹고 빼고, 또 뺐는데 차고 넘친다.


스페인 까미노를 걷는 여행자들 사이에 명언처럼 떠도는 말이 있다. '까미노에서 배낭의 무게는 그 사람의 삶의 무게와 같다' 지금 싼 이 짐들을 여행 일정 동안 다 사용하지 않을 거란 걸 머리는 아는데 말이지... 야속한 손은 캐리어에 옷 한 벌을 더 구겨넣고 있다. 사실, 양손 무거운 만큼 머리 속도 무겁다. 지구 반대편에 가는 만큼 많은 걸 보고 싶고, 경험해 보고 싶고, 어마어마하게 멋진 사진 작품을 카메라에 담고, 다른 이와는 특별한 어떤 걸 느끼고 오고 싶다. 고등학생 때부터 가보고 싶었던 우유니 소금사막이 있는 나라. 정말 대단한 사람들만 가는 줄 알았던 곳. 그곳으로 떠나는 마음이 복잡하고 부담스럽다. 잘 하고 싶은 이번 여행. 좋은 여행보다 잘 해야만 하는 여행. 그러니까 애초에 이번 여행은 부담을 안고 가는 여행이었다. 지구 반대편, 남미 대륙에 처음 간다는 이유만으로.


ⓒ 최요셉

                          

보통의 풍경, 가장 깊은 곳



수크레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자마자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려 집을 나서는데 창문에 귀여운 꼬마가 인사를 한다. 나중에 알아낸 꼬마 이름은 소피아. 집 주인 딸이었다. 볼리비아에 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아이다. 소피아와 짧은 눈인사를 마치고 대문을 나섰는데 옆집에서 나오시는 아주머니 한 분과 마주쳤다. 스페인어로 말을 거시는데 내가 아는 스페인어는 올라(안녕)가 전부. 어색한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우리 수다는 시작됐다. 아주머니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집 주인에게 전해 들은 상태였고, 나에게 마을 구경을 시켜주고 싶다고 했다(하는 듯했다). 그녀 이름은 베로니카. 마을 전경이 훤히 내다보이는 전망대부터 시장 골목골목까지 해가 지도록 나를 안내해줬다.


주말의 수크레는 평온했다. 여기저기 음악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마을 사람 모두가 가족,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골목에 있던 과일 파는 아주머니는 나른한 햇살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하고 있었고, 갑자기 펼쳐진 퍼레이드 행렬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 됐다. 아직 시차 적응도 못했는데 이곳 사람 사는 모습을 보고나니 한순간에 긴장이 풀렸다. 어느새 나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어깨춤을 추고 있었고, 함께 사진 찍으며 즐기고 있었다. 본격적인 여행 첫 날. 왠지 모르게 이들의 삶 깊숙한 곳에 들어온 느낌이다.



ⓒ 최요셉

                      

이상한 답례품



가족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깊은 산골로 들어왔다. 일주일간 뽀꼬뽀꼬, 까말리, 뜨로하빰빠. 3개 마을을 돌아야 한다. 이곳 아이들은 학교에 가려면 걸어서 4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마을엔 당연하게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고산지대라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대부분이 흙빛이다. 여기 살아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신기했다. 당장 어떻게 먹고 살며 뭐 하고 노는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데 가족 구성원이 온전치 않은 가정이 대부분이었고, 모두가 사진 찍는 걸 어색해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손을 잡으라는 내 말에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신다. 아이들은 프린트돼서 나오는 사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한국에서 일로 하던 촬영을 여기선 기쁨으로 하고 있다. '이 환경에서 어떻게 찍어'라는 생각은 마을 초입에서 이미 사라졌다. 이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담아 선물해주고 싶었다.


어느 날은 맛있는 밥을 대접해주겠다며 먹으면 바로 탈이 날 것 같은 수프를 주기도 했고, 학교행사에 초대해 귀빈석에 떡하니 앉히더니 밤새도록 아이들이 준비한 공연을 함께 보자고 했다. 산책을 하다가 일 하시는 모습을 찍어드렸더니 고맙다며 대뜸 밭에서 당근을 뽑아 내 손에 쥐어 주시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왜 이렇게 행복한지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곳에서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고 있다.



ⓒ 최요셉


우리는 서로가 신기하다



하루는 아이들에게 양치하는 방법을 알려줬더니 아이들 표정이 오만상이다. 방법을 몰라 양치하고 그대로 삼키는 아이들도 있다. 입에 넣자마자 뱉는 아이들도 있다. 알면 알수록 이 곳은 흥미롭고 신기하다.


고산지대라 황량하기만 한 이 곳은 밤이 되면 또 다른 세상으로 변한다. 여태껏 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별이 쏟아져 내린다. '우와...' 별을 보며 감탄하는 나를 이 곳 아이들은 신기해한다. 하긴 태어날 때부터 본 하늘일 테니 이렇게 많은 별이 신기할 리가 있나...


지금 이들과 나는 같은 듯 전혀 다른 곳에 살고 있다. 나와 다른 걸 보고, 듣고, 경험한다. 마을에 며칠 더 머물고 싶어졌다. 이 곳이, 이 곳 사람들이 신기하다. 그리고 그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혼자 온 나를 보며 신기해한다. 우리는 서로를 아주아주 신기하게 바라보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 최요셉
ⓒ 최요셉

                     

생각의 미니멀라이프



집 앞을 나가더라도 카메라를 들고나간다. 혹시나 멋진 장면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 아무것도 찍지 못하고 집에 들어온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늘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눈으로 보기보다 카메라로 찍는 시간이 더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온전히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한 것 같다. 맘먹고 카메라를 숙소에 놓고 산책을 간 적이 있다. 못 보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멋지게 찍을까 하는 고민이 사라지니 마음도 편해졌다. 한국에서 가져온 이런저런 고민거리와 생각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없어도 불편하지 않게 살 수 있었다. 인터넷도, 대형마트도, 패스트푸드점도,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는 샤워시설도 말이다. 이 곳에 온 지 2주가 넘게 지났는데 캐리어에는 아직 펼쳐보지도 않은 옷이 태반이다.


나는 지금까지 채우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다. 늘 바빠야 했고 생각해야 했다. 그러지 않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말하지만 여행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느려도 되고, 부족해도 되며, 화려하고 거창한 결과물을 내지 않아도 됐는데 말이다.


여행자에게 '미니멀'은 필수가 아닌 필수였다. 수화물 기준에 맞게 무게를 맞추고 배낭의 무게도 줄여야 하니 말이다. 어쩌면 여행자란 짐뿐 아니라 생각에도 미니멀라이프가 필요한 사람들일지 모르겠다. 비우고 덜어내야 비로소 낯선 곳에서의 경험과 생각들로 머릿속이 채워지기 마련이니까. 짐도, 머릿속도 비워야 채울 공간이 생기는 게 너무 당연하니까.

            

                    

ⓒ 최요셉


ⓒ 최요셉


여행자의 동지애



남아메리카 최대의 담호수인 티티카카호수를 여행할 때 일이다. 호수에 온 대부분의 여행자는 태양의 섬에 들어가 당일치기 트래킹을 즐긴다. 내 눈 앞에 있는 저게 바다인지 호수인지, 산인지 구름인지 신기해하며 걷다 보면 3시간 남짓 걸리는 코스. 나도 티켓을 끊어 섬에 들어갔다. 선착장에 내린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본인 페이스대로 걸어 올라간다. 나도 그들을 따라 2시간 걸었으려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지루해질 때쯤, 여행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 걷는 이도 있으며, 혼자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는 이도 있다. 간혹 눈이 마주칠 때면 눈인사를 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사과 한 쪽을 건네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행자들을 구경(?)하다가 육지로 나가는 배를 놓쳐버렸다. 오늘 저녁 페루로 가는 버스, 숙소까지 다 예약해놨는데 말이다(지금 생각해보면 티켓도 얼마 안 해 맘 편히 하룻밤 더 머물고 내일 나가면 될 일인데 그땐 완벽주의에 가까워서 여행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아, 어떻게 하지? 그때 눈앞에 보이는 레스토랑에 카드놀이 하고 있는 여행자들이 보였다. 다짜고짜 뛰어가 손짓 발짓을 해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스페인어를 하나도 못하고 영어도 잘 못한다. 너희들은 한국어를 못하겠지. 내가 오늘 페루로 가야 해서 이 섬을 나가야 하는데 배를 놓쳤다. 방법이 없니? 나 좀 살려줘라.' 아니, 근데 프랑스에서 왔다는 이 녀석들이 마치 자기 일처럼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레스토랑 아주머니를 부르더니 솰라솰라. 선착장에 있는 아저씨에게 솰라솰라. 지나가는 동네 청년을 부르더니 솰라솰라. 그러더니 10분만 기다려 보라며 나를 의자에 앉힌다.


10분 뒤, 아까 그 동네 청년이 다시 왔다. 한 손에 열쇠를 들고 말이다. 그 청년은 나를 육지까지 태워준다며 조그만 보트를 가리켰다. 그 후에 어떻게 됐을까? 한 시간 반을 달려 육지에 무사히 도착한 나는 숙소에 가서 따뜻하게 샤워까지 하고 페루행 버스에 올랐다. 동지애가 빛을 발한 순간- 여행자들끼리는 어떤 분명한 연대감이 있다.



ⓒ 최요셉


글│최요셉

사진│최요셉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www.artravel.co.k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