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RAVEL VOL.34
블라디보스토크 | 러시아 | 박채린
가끔씩 달력의 숫자들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황금연휴'를 만들어 낼 때가 있다. 오랜만에 시간을 풍족하게 음미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때 연휴와 상관없이 일을 해야 하는 이들은 두 배로 쓴 시 간을 견뎌야 한다. SNS에 올라오는 국내외 곳곳의 여행 사진들을 보 며 꾸욱 '좋아요'를 누르는 마음은 실은 질투가 절반일 때도 많다. 본 업과 파트타임을 병행하던 나는 원래 일이 쉬는 5월 초 황금연휴 때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분명 내 선택이었지만 남들 쉴 때 하는 일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일이 넘치는 힘든 연휴가 끝났다. 처음 으로 신청한 개표 참관인 활동이 이어졌다. 새벽 세 시까지 투표함을 지키다 캄캄한 밤하늘의 별을 보며 집으로 돌아갔다. 뿌듯함도 있었 지만 내면의 나는 휴식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5월 말에 1학년들의 야영과 2학년들의 수학여행이 동시에 잡혀 있었 다. 이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든 걸 내려놓아야지. 항공권을 훑어 보았다. 딱히 마음에 둔 목적지는 없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블 라디보스토크가 눈에 띄었다. 보통 3일이면 다 둘러본다는데,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여행을 선호하는 나는 5일 동안 머물며 아주 느 린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글자를 읽을 줄은 알아야겠다 싶어 서 여행 2주 전부터 러시아어 공부도 틈틈이 했다. 금요일 수업을 끝 내자마자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은 부산에서 러시아까지 채 두 시간 도 걸리지 않는다. 일본보다 더 가깝다는 말이 실감나는 부분이다. 에메랄드빛과 분홍빛으로 비행기 창 밖의 하늘이 잠기는 밤. 내 인생 첫 번째 '나 홀로 해외여행'이었다.
숙소가 있는 티그로바야 언덕길 아래로 바다를 따라 걷다 보면 해양 공원과 뎃스키 놀이공원이 나온다. 주말이라 그런지 공원이 온통 사람들로 가득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좀 무미건조할 텐데." 여행 오기 전, 러시아에서 유학을 했던 지인의 얘기를 듣고 기대치를 완전히 낮추었던 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토요일 아침의 블라디보스토크는 눈 앞에서 형형색색 빛나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 커다란 분수대가 있어서 여기를 Фонтан(Fontan)이라 부른단다. 이곳에 흘러나오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아이들이 저마다 탈 것에 올라 활기를 띠고 있었다. 광장에서 바다 쪽으로 눈을 돌리니 데크에 청년 한 명이 홀로 배낭을 끌어안은 채 세상 모르고 낮잠에 빠져 있었다. 몇몇 아가씨들은 비키니만 입고서 해변에 벌러덩 누웠다. 나는 왜 러시아가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했을까. "장담하는데, 유럽이 훨씬 위험해. 여긴 정말 안전하다니까?" 여행 첫날 저녁 시내 구경을 시켜주던 E가 해준 말이었다. "알겠어"라고 대답은 했지만 말만 듣고서는 경계를 풀 수 없었다. 그런데 주말 아침의 풍경을 보고 마음이 조금 달라진다. 청년이 낮잠에 빠져 있는 데크 한편에 나도 짐을 풀고 앉아 글을 써 내려갔다.
데크 근처 길에 노란 테이프 선이 붙여져 있다. 저게 뭘까, 하는 순간 등에 번호표를 붙인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으며 지나갔다. 노란 테이프 선의 끝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과 아이들의 부모들이 서 있었다. 선수 네 명이 모이면 경기가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이 풍경을 사진으로 담고 싶어서 나도 함께 아이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렸다. 얼마 되지 않아 진지한 눈빛을 한 아이들이 부모의 환호를 받으며 힘껏 출발선을 떠났다. 그런데 어쩐지 불안했다. 일등 아이만 보고 달리던 두 번째 아이가 그만 코너를 돌다가 코카콜라 자판기로 돌진한 것이다. 꽈당! 큰 충돌음이 났다. 뒤에 있던 두 명의 아이들은 역전 찬스를 놓치지 않고 꾸역꾸역 앞서갔다. 으앙 울음을 터뜨리고, 부모가 달려오고, 하는 장면들을 상상했으나 넘어진 아이는 울지도 않고 침착하게 일어나 다시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마지막 아이가 스스로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부모와 청년들은 끝까지 기다려 주었다. 아, 이 나라는 그렇게 위험한 곳이 아니다.
이곳에는 한국에서 쓸모를 다한 버스가 노장 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토카레브스키 등대(여기선 등대를 마약 Mayak이라고 부른다)로 가기 위해 탄 60번 버스에도 한국 노선도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게다가 플라스틱이 녹아 내릴 듯한, 기억 속의 손 떼 묻은 버스 냄새도 그대로였다. 익숙한 감각이 낯선 도시에서 되살아나니 한국에서 이 버스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만 같은 착각도 들었다. 버스의 종착역인 토카레브스키 등대는 육지에서 등대 방향으로 왼쪽에는 '금각만 바다'가, 오른쪽에는 '아무르만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바다가 얼어붙는 겨울이나 썰물 때에만 바다 사이로 난 길을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운에 맡겨보고 싶은 마음에 썰물 시간도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향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등대까지의 길은 2km 정도. 찻길을 걸어야 해서 다소 불편했지만 먼 길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내 운을 확인해보니, 저 멀리서 바다가 두 팔을 벌리고 등대까지의 길을 훤히 내어주고 있었다. 두 개의 바다는 길 하나를 가운데 두고 마주보며 일렁이고 있었다. 등대까지 걸어가는 동안 삶이 꼭 이렇게 두 바다 사이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기대라는 바다와 나의 바람이라는 바다. 혹은 내가 지키고 싶은 기준과 세상의 시선이라는 바다. 만날 듯 말듯한 두 바다 사이에 모험이 삶인 것 같았다. 만나고, 충돌하고, 튀어 오르고, 부서지고, 결국에는 어떤 빛깔과 온도로 합쳐져 잔잔해질지 상상했다. 육지로 나올 즈음엔 마주 오는 사람과 서로 비켜서서 지나가야 할 정도로 바닷길이 좁아져 있었다. 빨간 모자를 쓴 채 1876년부터 이곳을 지켜 온 토카레브스키 등대가 뒤에서 힘껏 응원을 보낸다. 그 응원의 증표로 머리카락이 소금기를 잔뜩 머금었다.
버스와 택시로 가득한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앞에 왔다. 'ВЛАДИВОСТОК'라는 빨갛고 예쁜 글씨가 크림색 건물 맨 위에 왕관처럼 씌워져 있었다. 여기서 믿기 힘든 길이 이어진다. 모스크바까지 7번 시간대가 바뀐다는, 상상할 수 없는 길이 9,288km. 지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거리다. 그 엄청난 숫자가 무색하게 입구는 장난감 가게처럼 앙증맞은 모습이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출입문을 열었던 나는 무장한 경비원들의 무자비한 눈빛에 놀라 정신없이 가방과 카메라를 벗어야 했다. 꾸물거릴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가방끈과 카메라 끈이 서로 뒤엉키는 바람에 괜한 오해를 살 뻔했다. 무사히 통과를 하고 나서 인사를 건넸더니 경비원들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정오 무렵의 태양이 역내를 어느 때보다 더 환히 비추고 있었다. 현재 블라디보스토크 역의 모습은 1912년 모스크바의 야로슬라프스키 역이 만들어지면서 그곳을 흉내 내 비슷하게 다시 지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야로슬라프스키 역을 떠난 사람은 다시 야로슬라프스키 역에 도착한다"는 농담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들의 말처럼 9,000km를 사이에 둔 서로 비슷하게 생긴 두 역이 처음과 끝에서 마치 도돌이표처럼 여행을 무한하게 만든다. 시작과 끝이 닮아있다. 종착역에서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그곳이 바로 시작점이 된다. 끝과 시작이 다르지 않은 길이다. 누군가는 시작점에서 모든 걸 마치기도 하며, 끝인 줄 알았던 지점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기도 한다. 다리 위에 서서 끝이고 시작인 역의 사람들을 바라본다. 기차는 소리도 모습도 아름답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힘 있게 멈추고, 다시 힘차게 출발하는 에너지였다.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로 종교적인 건축물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혼자'가 가장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공간이 아닐까. 아무도 모르게 충분히 솔직해져도 되는 공간. 그 덕분에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이런 곳에서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이미 관광 명소가 되어 인파가 끊임없이 들락날락 거리는 건물은 제아무리 웅장하다 해도 분위기가 반감되고 만다. 무작정 걷다가 금박 지붕을 쓴 정성스러운 건물을 마주했다. 내게 익숙한 성당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러시아 정교회였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지역의 최고권자인 총대주교가 사실상 교황에 준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는 과거 소련 체제 때 자신들이 다스리던 교구들이 이후 로마 교황 소속으로 복귀하고 나서 자신들의 위치와 같은 총대교구로 승격되는 것에 반발했고, 그동안 로마 교황과의 만남을 거부해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6년 2월, 프란치스코 교황과 키릴 총대주교가 역사적인 회동을 이루면서 무려 천 년 만에 화해의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뿌리가 같은 종교이지만 이곳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감도는 성전 앞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입구에 준비된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내가 만들어내는 소음이 잦아들자 주위에는 고요함과 초의 나무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만 남았다. 휘릭-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서 건너편을 보니 할머니 한 분이 성호를 그으며 기도서를 읽고 계셨다. 그 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한없이 편안하고 고요해진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성전 내부에는 할머니와 나 둘만 있었다.
성당에서도,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혹은 마음이 흔들릴 때도, 내가 한결 같이 드리는 기도는 '가장 나답게 살게 해주세요. 아니면 그걸 바라며 살아갈 용기라도 주세요'였다. 그것이 행복의 근원이라 생각했다. 넘어진 아이를 응원하는 어른들의 박수 소리, 오랜 세월 동안 빛이 되어준 토카레브스키 등대의 굳건함, 그 앞에서 물결을 합치던 두 바다, 출발과 멈춤에 있어서 망설임 없던 열차들, 고요 속에서 수많은 기도를 감아올리는 성전 내부의 나무 심지들. 이 여행을 통해 어쩌면 나는 그 용기의 재료들을 모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혼자 여행을 결심한 순간부터 모험은 시작되는지도.
글│박채린
사진│박채린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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