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RAVEL VOL.33
미국 | 알래스카 | 케이채
Prologue
북극곰이었다. 내가 알래스카를 가기로 한 이유는 사실 그것 하나였다. 콜라 광고에 나와 귀여운 표정을 짓던 녀석들. 지구온난화의 이야기가 나오면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모습들. 언젠가 북극곰이 멸종할 수도 있다는 뉴스들을 접하며 나는 늦기 전에 녀석들을 사진으로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이 좋아 북극이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어디로 가야 북극곰을 볼 수 있을까? 지도를 펼치고 구글신의 도움을 얻어 검색을 한 끝에 나에게는 세 가지 옵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째로는 캐나다의 작은 마을 처칠. 북극곰 관광이라고 할 만큼 가장 북극곰 마케팅이 활발한 곳이고, 그들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찾는 곳이다. 비용은 비싸긴 하지만 나머지 두 옵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고, 시즌 중에 가면 확실한 확률로 북극곰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너무 관광지 같아서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째로는 노르웨이의 북쪽 섬 스발바르가 있었다. 이곳 또한 북극곰들을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섬으로 알려져 있지만 단점이라면 비용이 훨씬 더 비싸며, 배를 타고 다니면서 북극곰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다른 곳들과 달리 북극곰을 반드시 만날 수 있다는 보장까지는 없는 곳이다.
그렇게 캐나다와 노르웨이가 어딘지 모르게 흡족하지 않아 고민하고 있을 때 알게 된 곳이 바로 칵토빅(kaktovik). 알래스카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칵토빅은 알래스카에서 두 번째로 북쪽 끝에 위치한 마을이며, 알래스카 원주민들이 인구의 전부다. 그렇다고 문명과 떨어져 사는 것은 아니다. 어찌됐던 미국땅이 아닌가. 세상의 끝과 같은 위치지만 문명은 갖추어진 이 작은 마을은 북극권의 바다에 맞닿아 있고, 주변에는 9월에서 10월까지 북극곰들이 출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피나 BBC 같은 내로라하는 채널들이 북극곰을 담기 위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관광객을 위한 곳은 그만큼 아니라 비용도 많이 들고 관광 인프라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딱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래스카는 내가 가야만 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초 어느 날. 페어뱅크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나는 몸을 실었다.
칵토빅 Kaktovik
칵토빅은 전형적인 북극권의 마을이지만 미국의 도움으로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칵토빅 사람들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 아무래도 겨울이라 밖이 워낙 춥다 보니 대부분 집에서 생활하는 탓이다.
이누이트와 고래 Innuit and Whale
원래 칵토빅의 이누이트 사람들은 고래를 사냥해서 먹고 살았는데, 지금도 미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 매년 정해진 양의 고래를 사냥한다. 마을 어귀에는 해체된 고래의 뼈가 남아있는데 고래잡이 후에는 북극곰들이 남은 고기를 먹으러 놀러 오기도 한단다.
사실 어느 밤이던 마을 골목에서 북극곰을 만날 확률이 크다고 하니 외출할 때마다 이렇게 조마조마한 마을이 있을까 싶다.
북극곰을 만나다 Ploar Bear
칵토빅에서 보트를 모는 이누이트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북극곰을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과연 볼 수 있을까 하고 크게 긴장했지만 그 어떤 서스펜스도 없이 북극곰들이 나타나주었다. 직접 그들을 만나고 사진으로 담았을 때의 감격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체감 온도 영하 20도쯤 되는 환경에서 칼 같은 바람에 수시간을 견디며 사진을 찍다 보면 발에 감각이 없어질 정도가 되지만 그래도 떠나기 싫을 만큼 특별했던 시간이었다.
개구쟁이 아기곰 Imp Baby Bear
북극곰은 대부분 세 가족이 함께 목격되는데, 성인 곰은 인간에 별 관심이 없지만, 아직 어린 녀석들은 호기심이 많아 보트 코앞에까지 다가온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의 귀여움이었지만 시도는 하지 않았다(그랬다면 아마 나는 지금 여기서 글을 쓰고 있지 못할 것이다).
취침 Go to bed
잠이 많은 북극곰들이라 애써 발견해도 잠을 자고 있을 때도 많았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눈을 뜨던 감던 녀석들은 최고의 귀염둥이들이었으니까. 나를 안내해준 가이드 칼(Carl)은 보트 위에서 어느 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다른 동물들은 눈 감고 자고 있으면 사진 찍기가 별로인데, 북극곰만은 잘 때 모습도 최고라고. 나는 그의 말에 백프로 동감할 수 밖에 없었다.
갑작스런 작별 Sudden Farewell
5일 동안 보트를 타고 아침이면 기상 상황을 확인하고 보트를 타러 나가 북극곰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마지막 이틀은 날씨가 더 추워지고 보트장이 드디어 얼어붙어 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조금 일찍 북극곰들과 이별하게 되었다. 지금도 무척 아쉽게 생각하는 대목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다시 여행하고 싶은 장소가 있냐고 묻고는 하는데, 칵토빅은 언제나 그 답의 상위권에 자리하는 곳이다. 언젠가 다시 한번 그들 곁에 가고 싶다.
페어뱅크스의 오로라 Fairbanks
북극곰을 보고 페어뱅크스로 돌아와 며칠을 머무르며 오로라를 쫓았다. 이곳의 호텔들은 대부분 오로라가 뜨면 전화로 알려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몇 번은 그렇게 새벽에 달려나가 오로라를 보기도 했고, 한두 번은 오로라를 볼 확률이 높다는 지역들을 찾아가 추위에 떨기도 했다. 아직도 처음으로 오로라가 내 눈에 나타났던 그 순간은 잊지 못한다. 살아있는 생물이 하늘 위에서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그 묘한 움직임. 그 색깔. 그 고요함. 누구라도 자신이 가장 처음 오로라를 본 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도 나는 눈만 감으면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
Epilogue
알래스카의 북쪽 도로를 하루 종일 달렸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 데드호스(Dead Horse)라는 작은 마을에 며칠을 머무르기로 했던 터였다. 페어뱅크스에서 내 생애 처음 오로라를 본 후 나는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중독된 사람처럼 새로운 장소에서 또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하지만 여행 중 날씨 운이 나쁘기로 소문난 나에게 또 한번의 오로라는 사치였는지, 데드호스에서 머무르는 4일의 시간 동안은 거대한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버렸다.
되돌아보면 알래스카에서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북극곰을 빼면 그렇게 많은 사진을 담지도 못했다. 마침 겨울이 찾아온 시기였고, 겨울시즌에 대부분 알래스카의 많은 것들이 문을 닫아 버리기 때문에 지방은 물론 페어뱅크스 마저 무척이나 조용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알래스카의 북쪽을 연결하는 도로는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낭비한 시간이었냐면 그렇지는 않다. 차갑지만 눈부신 그 도로 위를 달리며 만났던 새하얀 풍경들. 가끔 찾아온 햇살에 비친 눈 부신 겨울의 시간들은 무척 인상 깊게 남았다. 알래스카를 아름답게 담아낸 영화 「Into The Wild」의 사운드트랙을 들으면서 그 풍광을 바라보았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북극곰들은 잘 지내고 있을지. 오로라는 이제 아름답게 그 하늘을 물들이고 있을지. 사실 알래스카는 여름 시즌이 소위 말하는 성수기로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때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알래스카에 간다면 나는 또 한번 겨울에 와보고 싶다. 비단 북극곰 때문만은 아니다. 겨울의 알래스카가 가진 그 매력은 소수만이 알고 있는 것 같다. 나 또한 그 비밀을 이제 알고 있기에, 그때 또 한번 알래스카를 담아보고 싶다.
글│케이채
사진│케이채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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