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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am Nov 21. 2021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쥘 르나르, <홍당무>

홍당무는 늘 홍당무라고만 불려서 식구들도 진짜 이름을 금방 떠올리지 못한다. "왜 홍당무라고 부르시죠? 불그스름한 머리카락 색 때문인가요?"
"저 아이의 마음속은 더 시뻘겋답니다."
르픽 부인이 대답한다.
 -쥘 르나르, <홍당무> 

재인아, 너는 엄마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떤 기분일 거 같아? 동생은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도 더 귀히 여기면서, 너에게 온갖 궃은 일을 다 시키고,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고, 네가 하는 일은 전부 불안해하고, 너의 사소한 부탁도 죄다 귀찮아 한다면 너의 기분은 어떨까? 물론 엄마가 그렇게 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렇다고 가정해보자는 이야기야. 생각해봐. 세상에 그것보다 슬픈 일이 또 있을까? 사랑받지 못한다는 감정보다 비참한 게 있을까? 하물며 엄마에게도.

아이에게 엄마의 사랑이 없다는 건 식물에게 물이 없다는 이야기와 같을지도 몰라. 처음엔 티가 나지 않을지 몰라. 하지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면 조금씩 말라가겠지. 하루하루 바싹바싹 말라 죽어가는데 주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겠지. 아마 사랑 받지 못하는 아이는 이 식물 같은 거라고 생각해. 아이에게 엄마는 전부니까, 우주니까.  


프랑스 소설가 쥘 르나르의 소설 <홍당무> 속 주인공이 꼭 그랬어. 엄마 눈엔 물 없이 사는 식물처럼 보였어. 바싹바싹 말라가는 불행한 식물 말이야. 주인공 이름은 홍당무야. 무슨 이름이 그러냐고? 그러게나 말이야. 그런데 소설 어디에도 이 아이의 진짜 이름은 등장하지 않아, 아빠도 엄마도 형도 누나도 주변 이웃들도 심지어 학교에서도 아이를 홍당무라고 부르지. 홍당무의 엄마 르픽 부인은 형 펠릭스와 누나 에르네스틴에게는 극진한 사랑을 보이지만 홍당무에게는 달랐어. "대체 아들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만큼 홍당무를 미워했지. 형 누나도 마찬가지야.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동생 홍당무를 괴롭히고 놀리고 이용했지. 왜 아니겠어. 르픽부인이 홍당무를 막 대하는 모습을 늘 보고 자랐으니, 동생에게 응당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겠지. 그래도 아빠는 좀 다르지 않냐고? 응, 달라. 하지만 더 나을 것도 없지. 홍당무에 대한 사랑을 간혹 보이기도 했지만 자상하고 다정한 아빠는 아니었어. 늘 바쁘고 그래서 집안일에 무심한 아빠지. 엄마의 그런 행동을 빤히 알면서도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인적이 단 한 번도 없지. 


이런 환경에서 자랐으니 어쩌면 홍당무의 모습을 어깨가 축 쳐져 있는 작고 무기력한 소년으로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홍당무는 작긴 했지만 당당했어. 늘 구박받고 무시 당하면서도 그냥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지. 엄마는 그런 모습이 더 안쓰럽기도 했지만. 있지, 엄마는 펑펑 우는 장면보다 울음을 꾹 참는 장면이 참 슬프더라고. 마음으로 울고 있는 것만 같달까? 엄마 눈에 홍당무가 그렇게 보였거든. 


근데 있지, 엄마는 엄마여서일까? 안쓰럽긴 했지만 르픽부인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대목도 있었어. 르픽 부인의 말과 행동이 참 과하긴 했지만 왜 그랬는지 간혹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더라. 홍당무의 장난과 잔인함이 선을 넘는 장면들이 몇몇 있거든. 게다가 아이인데 아이답지 못하게 잔머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더라고. 그 빤한 수를 엄마 아빠에게 들키기는 했지만  홍당무의 잔머리는 아이답지 않은 구석이 많이 있었어. 이건 나중에 너와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겠지만 어쩌면 너는 공감할 수 없을지도 몰라. 아이의 시선으로 보면 홍당무의 행동이 (과하긴 해도)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다. 책이란 게 그렇잖아. 같은 책을 읽어도 너와 내가 읽는 책이 다르고,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내가 읽는 책이 다르거든. 나의 환경과 상황을 대입해가며 읽게 되니까 말이야. 


아참 재미있는 건 있지. 이 소설이 작가 쥘 르나르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점이야. 르나르도 홍당무처럼 삼남매의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엄마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자랐대. 그의 말에 따르면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르나르를 사랑하지 않았대. 홍당무랑 똑같지? 너도 읽어보면 알겠지만 <홍당무>는 진짜 재밌어. 아니, 정말 웃겨. 배꼽잡고 깔깔댈만큼 웃긴 장면들이 많이 있어.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그래서 늘 사랑이 그리웠던 조금은 불우한 기억을 이토록 유쾌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작가는 정말 작가구나 싶었어. 


좀 전에 말했듯, 홍당무가 동물들에게 잔혹하게 구는 모습과 잔머리 팽팽 굴리는 모습에 그 꼬마를 잠깐 얄미워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홍당무를 만난다면 절대 미워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눈동자에 한가득 진심을 담아 늘 사랑받길 원하고 있을 머리가 불그스름한 바로 그 아이를 만난다면, 엄마는 그 아이를 꼭 안아주고 싶어. 그 순간에도 그 아이는 '이 아주머니가 왜 이러지? 뭘 원하는 게 있는 걸까?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표정을 지어야 할까? 아니면 정색하고 "왜 이러세요" 하고 말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나를 착한 꼬마라고 생각할까?' 이리 빙글 저리 빙글 머리를 굴리겠지.


있지, 딱 한 사람이면 되거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말이야. 단 사람에게라도 진정한 사랑을 받고 있다면 기운이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다시 치고 올라올 힘을 낼 수 있거든. 그래서 안타까웠어. 홍당무에게는 그 단 한사람이 없었거든.   물론 아빠도 홍당무를 사랑하고 대부도 홍당무를 사랑하지만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오히려 상대방을 외롭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홍당무의 진짜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는 게, 홍당무에게 진짜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게 슬프지 않니? 홍당무는 늘 스스로 위안을 찾고 스스로 힘을 내야 했지. 생각해보면 강한 아이 같아 홍당무는.


재인아, 우리가 삶에서 홍당무 같은 친구를 만난다면 그 친구를 꼭 안아주자. 그리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자. 너도 알 거야. 그것만이 줄 수 있는 따뜻한 위로를. 


그것을 주자, 우리. 


-홍당무의 진짜 이름을 알고 싶은,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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