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담서원과 함께한 1년의 기록
내일 만날 친구에게 쓸 엽서를 찾다가 어린 시절 친구가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같은 학교를 나와 첫 절친으로 3년 동안 내내 등하교를 같이하고 (아침저녁 내가 전날 읽은 책 얘기를 해 줬었다. ) 중고등학교 다니면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6년 내내 일주일에 한 통씩 꼭 편지를 주고받았던 친구. 아빠 때문에 지옥 같던 청소년기를 버티게 해 준 창구 같았던 존재. 우리 아빠와 달리 이 친구의 아빠는 참 다정하고 딸에게 져주는 아빠였고 의식은 못 했지만 내심 그게 나에겐 열등감이었던 것 같다. 그 애는 사리가 밝고 똑똑했다. 어리숙한 나와는 좀 달랐는데 우린 같은 동네여서 언제 친구가 됐는지 기억이 안 나게 친해졌다. 아마 내가 이끌린 쪽이었을 거다. 친하면서도 조금 어려워한 기억이 있다.
대학 졸업하고 우즈베크에 가 있는 동안 나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준, 교회 사람이 아닌 친구. 임용 준비하느라 돈이 없을 때 밥도 화장품도 사주고 부담 없이 미안해하지 않으며 만나도 됐던 친구. 내 생일에 전화를 세 번이나 했는 내가 없어서 통화를 못했고 내가 이메일을 잘 안 해서 썼다는 편지. 같이 어릴 적 살던 동네에 같이 가보자고 보고 싶다고 힘내서 잘 살자고 요즘 살이 쪘고(하나도 안 쪘는데)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많다고 쓰여 있다. 아픈 내 동생 안부와 부모님 안부를 묻는, 내 가족과 연애를 다 아는 친구. 두 장의 편지에서 20대 중반인데도 성숙하고 배려심 많은 친구의 깊이가 읽힌다. 난 그 시절 이걸 알았었나?
나는 어쩌다 이 친구를 잃었을까. 친구의 결혼과 육아의 물결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는 동안 나는 서울에 정착하기 바빴고 좀 더 손을 내밀던 친구를 내가 점점 잊었다. 노력하지도 않았다. 나이 든 지금에야 편지에 밴 친구의 외로움과 나에 대한 사랑이 절절이 느껴진다.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 난 참 무심한 사람이었다. 슬프다. 이런 사람이 나에게 있었구나. 나에게 사랑을 쏟아준 사람이 많았구나.
초등학교 1, 2 학년 아이들은 칠판 지우는 걸 정말 좋아한다. 칠판 지울 사람~ 하면 정말 번개 같이 손을 들고 다 튀어나와서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저 맨 위의 글씨까지 싹싹 닦는다. 그럼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뭔가 행동 유도를 할 때 이따 칠판 지움권을 주겠다고 유혹하기도 하는데 대체 칠판 지우는 게 왜 그렇게 좋은지 이해가 안 돼서 물어본 적이 있다.
칠판 지우는 게 왜 좋아? 했더니 하나 같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도움을 준 기분이 좋아요! 도움을 줬잖아요!"라고 답했다. 그게 자기에 집중된 행동이든 뭐든 간에 앞에 있는 나에게 도움이 되면 뿌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에 자꾸만 하고 싶어 진다는 게 뭉클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이고 싶은 마음이 다치지 않아야 계속 다정할 수 있을 텐데 그걸 지켜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었다가 점점 무뚝뚝해졌는데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다. 피해의식이 내 좋은 면도 다 깎아낸 것 같아서 다시 보게 된 지 얼마 안 됐다.
이번 주에 항상 일찍 오는 2학년 B군이 반짝이는 스티커를 꺼내어 만지작거리길래 예쁘다고 했더니 선생님 가지란다. 너 쓰려고 가져온 거 아니냐니까 자긴 스티커가 조금도 필요 없고 쓰지도 않는단다. 어찌나 단호하던지. 내가 매주 새 스티커를 사서 붙여주니까 내가 스티커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챙겨 온 것 같았다.(실제로 스티커 좋아함) 세상에 어쩜 이렇게 다정할까. 이런 애들을 매주 보니까 세상에 좀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오늘 호담서원 원데이 클래스가 있었는데 페친도 오시고 일하면서 만난 분도 오시고 원래 회원도 오시고 재신청해서 오신 분도 있었다. 특히 오늘은 참가하신 분들이 모두 내가 한 어떤 말이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었단 말을 하고 가셨다. 뭔가 어린이들이 나에게 뿌려준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 같은 기분이 들며 나도 칠판을 지워서 뿌듯한 기분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니 정말 멋진 일이다. 내 노트엔 B군이 준 반짝이는 스티커도 있고.
초 1.2 수업을 처음 시작한 날. 유치부 교사 몇 년의 경력을 믿고 안심했다가 큰 충격을 받았었다. 90분씩 두 번 수업하는 내내 '나도 말 좀 하자!!!'라는 생각만 했다. 난 어디 처음 가면 엄청 눈치를 보는 성격이라서 내내 상황 파악을 했는데 이게 나의 어설픔 때문인지 아이들의 상태 때문인지 시대의 변화인지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지 뭔지 판단이 안 됐다. 진짜 징글징글하게 말이 많았고 질서도 없었다. 그래서 매주 어떻게 내가 주도권을 잡을 것인지 연구하고 반응이 좋은 건 극대화하고 조금이라도 지루한 것 같으면 어떻게든 개선시켰다.
아무리 어려도 초등학교 5학년만 넘어도 이런 걱정 필요 없다. 웬만한 아이들은 정성 담은 지적 권위를 보여주면 한 시간 만에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변하니까. 이렇게 어려운 걸 이렇게 쉽게 설명하다니!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는 머리 쓰는 기분! 공부란 이런 것이구나!! 이런 거 순식간에 느끼게 할 수 있다.
하지만 8세? 9세? 얘네한테 난 그저 마스크 쓴 수없이 많은 선생님 중 한 명일 뿐. 얘 내가 무슨 간절함이 있어서 내가 달라 보이겠는가. 내가 아무리 잘해 봐야 원래 그런가 보다 하겠지. 난 그야말로 초년생보다도 암담한 경력만 많은 누군가일 뿐.
그래서 ox퀴즈 만들고 내용 디테일에 집착하게 만들고 어떻게든 나와서 쓰고 손들고 따지고 맞히려고 안간힘을 쓰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경쟁을 좋아하고 자기만 잘하는 걸 좋아하고 수업에 패턴과 규칙이 있는 걸 좋아한다. 난 그 패턴과 규칙을 아이들이 만들게 했다. 청소년에게 그렇게 해왔듯이. 지금은 쉬는 시간 지키고 인사할 줄 알고 수업 순서도 알고 등등등~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많이 벌어졌다. 새침해 보이고 반항심을 보이고 공격적인 어투가 있던 애들이 연속으로 몇 학기 걸쳐 신청해서 수강을 했다. 쉬는 시간에 괜히 옆에 서 있다가 은근슬쩍 무릎에 앉았다. 뭔가 나로선 어린이와의 친밀한 접촉은 너무 오래된 일이라 어색했지만 (청소년 수업은 절대 터치를 안 한다) 아이들의 그런 표현은 오전 수업의 배고픔을 잊게 해 줬다. 하루종일 가르치는 분들 거의 마법사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어깨에 손만 얹고 머리 한 번만 쓰다듬어도 자세가 달라진다.
첫 학기가 너무너무 힘들었는데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1학년 2학기 때 처음 만나 이제 딱 한 주만 남은 여자 아이가 있다. 정말 인형 같이 생겼고 표정 변화도 없고 잘 안 웃는다. 발표도 비협조적이고 맨 뒤에 앉아서 수업 듣는 걸 좋아한다. 수업을 억지로 듣게 듣나 보다 했다. 그런데 1학기 때도 또 들어왔다. 가끔 늦어서 알게 됐는데 어머니는 토요일에도 출근하셔서 본인이 알아서 챙겨 오는 것이었다. 동물을 엄청 사랑해서 모든 활동지에 동물 이야기를 쓰고 그림으로 잘 표현한다. 발표는 잘 안 하고 항상 뒤에 혼자 앉지만 정말 열심히 거침없이 예리한 포인트로 작품을 분석하고 자기표현을 잘 기록한다. 나한텐 늘 데면데면했다.
1학기 2분기 때 수강 취소를 해서 역시 어려웠나. 싫어했나 했는데 엄마한테 문자가 길게 왔다. 아이가 수업을 너무 좋아하는데 코로나 이후 건강 수치가 너무 안 좋아져서 취소했다고 아이가 2학기 한 번 밖에 안 남았는데 독서 수업이 제일 재밌는데 왜 묻지도 않고 취소했냐고 화냈다고 2학기 때 꼭 다시 올 거라고. 그 문자를 보내주신 게 너무 고마웠다. 난 애들을 오래 가르쳤는데도 정 떼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인사도 없으면 좀 상처받는다. 평소에 엄청 무뚝뚝한데도 그렇다.
2학기 때도 여전히 각자 열심히 잘 지냈다. 오늘은 웬일인지 쉬는 시간 내내 친구랑 내 옆에 계속 서 있었다. 말도 안 하고. 그러다가 이 스티커 묶음을 나한테 주는 것이었다! 진짜 심쿵했다. 이거 나 줘도 돼? 끄덕끄덕. 나 주려고 일부러 가져온 거야? 끄덕끄덕. 여전히 표정 변화는 없다. 너무 고맙다고 정말 잘 쓰겠다고 하니까 그제사 간다. 내가 매주 아이들 글 쓰는 동안 개별적으로 읽고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붙여주는데 그걸 보고 나한테 필요한 걸 골랐나 보다. 너무 감동받았다. 이제 한 주밖에 못 보다니. 너무 아쉽다.
오늘 강의 평가서 쓰는 날이었는데 '선생님이 스티커도 맨날 챙겨 오시잖아.' 이런 말이 나왔다.(수업 준비 잘 한단 소리) 진짜 애들한테 지적인 능력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님. 혹시나 하고 매주 참 잘했어요 말고 따로 꼭 챙겨간 스티커가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