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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Sep 15. 2023

100년 전의 엽서 100년 전의 산책

어느 시장에서 발견한 엽서의 사연

옛날옛날, 내가 22세 때 우스베키스탄이라는 나라에서 온갖 고생  및 책에도 안 나올 기상천외한 경험을 하며 1년 동안 민간 한글학교 강사를 한 적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소련이 붕괴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할머니가 있었고 아무리 큰 번화가를 찾아가도 그 흔한 맥도널드조차 없었다. 나는 한국 음식과 미국 음식의 허기를 콜라로 달래다가 한 달 만에 급격히 살이 올랐고 어쩌다 영화를 보러 가면 남자 성우 한 명이 낮은 도에 맞춘 톤으로 더빙한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나마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은 브로드웨이라고 부르는 광장에 나가 상설 벼룩시장을 구경하는 거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돈 주고도 못 살 가치로운 물건들이 꽤 많이 길거리에 나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옛날 사진과 엽서를 신중히 선별하여 사서 한국까지 가져왔는데 호담서원에 그중 사진과 필체가 멋진 엽서를 액자에 넣어 걸었다.

그중 이 엽서는 특별히 필체가 우아하고 왠지 마음이 끌려서 대체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필기체는 너무 어렵고 군데군데 얼룩이 져서 도저히 번역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우즈베키스탄에서부터 지금까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마리나가 놀러 왔다. 난 커피 한 잔을 주고 어서 읽어 달라고 했다. 마리나는 러시아어를 읽고 뜻을 알려 주고 난 그걸 윤문 했다.


"지난주에 너에게 두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받았니? 우리는 지금 가을이야. 아직 코트를 입을 정도는 아니야. 특히 저녁때 따뜻해서 기분 좋게 짧은 산책을 해. 너와 엄마한테 진심 어린 안부를 전한다. 사랑 속에 머물며 늙은 아버지가."

1916년 9월 31일. 런던에서.

100년도 더 된 엽서. 런던에 사는 아버지가 모스크바에 있는 가족에게 아직 두 통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받지 못한 채 보낸, 특별한 소식도 아닌 엽서. 아무것도 아닌 내용을 왜 굳이 써서 보냈을까?


번역을 하고 나니 이런저런 영상이 뭉개 뭉개 떠오른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매일 엽서를 쓰는 어떤 남자. 우체부를 기다리는 가족. 그리고 영국. 맞춤법에 오래된 구두점 표기도 있고 문체가 고상해서 식자층이 썼을 것 같다. 엽서가 쓰이기 두 달 전에 1차 세계 대전 최대의 사상자가 났었고 불과 다섯 달 후에 러시아는 무너진다. 나이 든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이나 산책하는 일상을 말한 걸 보면 참전 군인은 아닌 것 같지만 문체나 글씨체를 보니 전쟁의 소용돌이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는 사람일 것 같다.


내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살 때도 우편물이 분실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답장을 기다리지 않고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나쁜 얘기는 절대 안 썼다. 전쟁 중에 타국에 있는 나이 든 아버지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정말로 저녁에 산책을 즐기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삶은 아니었을 거다. 전쟁이 끝난 후 이 가족은 다시 만났을까? 아무튼 아들은 이 엽서를 받았고 간직했다가 그게 우즈베키스탄에까지 흘러갔고 그게 내 손에 들어와 한국에까지 왔다. 그리고 고려인 3세를 거쳐 한국인이 된 마리나가 번역했다.


왠지 기념해 주고 싶어서 글로 적는다. 호담서원에 런던과 모스크바와 한 가족과 전쟁의 스토리가 더해졌다.


이름

Детенгоф Э.О.


주소

Город Москва, Вознесенская, большой Демидовский переулок N: 24, дом Гекке, квартир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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