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비디오천국의 추억(1)-프롤로그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누군가는 이랬다. 지나간 일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아름답다고. 아마 그럴 것이다. 지금은 없어진 그 무엇을 추억한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돌아보고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오늘을 생각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얼마 전 이문동 골목길을 거닐다 사진을 몇 방 찍었다. 이 골목길은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드나들었던 길이다. 지금은 아파트로 변했지만 이 길만은 20여년 전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당시 살았던 집이 남아있었다. 한때 이문동의 '핫플레이스'(?)였던 이문제일시장은 여전히 간판만 남은 채 문이 닫혀있다.
이 골목을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은 없어져버린 '그 곳' 때문이다. 특히 집 옆에 그 곳이 있었다는 것은 '인연'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그 곳에서 꿈을 만났고 즐거움을 만났고 사랑을 만났다. 한편으로는 폭력을 만났고 성(性)을 만났다. 이제 그 곳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사람과 영화, 책이 있었던 그 곳 '비디오천국'.
'비디오천국'. 비디오 가게의 상호명이다. 90년대 초반은 누가 뭐래도 비디오의 전성시대였고 자연히 비디오 대여점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당시 집 주변에는 '비디오천국'과 함께 '곰비디오'도 있었다. 곰비디오는 주로 신작이 많았는데 그 신작이 '대여중'인 경우가 정말 많았다. 그 기억 때문에 곰비디오보다 비디오천국을 더 선호했는지도 모른다. 신작을 생각보다 용이하게 구할 수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함박눈이 펑펑 오던 크리스마스날, 드디어 우리 집에 비디오가 들어섰다. 'TV과외' 열풍이 가져온 혁명적인(?) 상황이었다. 당시 부모님은 비디오를 내켜하지 않으셨지만 TV과외 녹화가 꼭 필요하다는 자녀들의 설득을 막을 수 없었다. 때마침 TV가 고장난 것도 호재였다. TV를 바꾸는 김에 비디오를 마련하자. 그렇게 비디오는 집에 들어왔다.
비디오로 본 최초의 영화는 <지존무상>이었다. 이 작품은 대여점에서 빌린 정품이 아니라 형 친구가 공테이프에 녹화한, 빠른 속도로 녹화해 한 테이프에 두 영화를 담아낸 테이프였다. <지존무상>과 <비오는 날의 수채화>가 담겨진 테이프. 그것이 나와 비디오와의 첫 만남이었다.
당연히 화질은 나빴고 색깔도 어두워서 유덕화와 알란 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 때는 영화가 재미있었다기보다도 처음으로 보는 비디오라는 신기함이 더 셌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존무상>은 홍콩 카지노 무비의 재미를 한껏 보여준 영화였고 무엇보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았다. 도박사가 일생에 한 번 나올까말까한다는 전설의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 영화는 때론 요상한 욕망을 갖게 하는데 당시 내가 그랬다.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꿈꾸는 중학생의 모습.
<지존무상>만 몇 번을 보다가 집에 아무도 없는 틈에 본 <비오는 날의 수채화>는 화면이 의외로 아름다웠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옥소리라는 배우를 정말 아름답게 찍는다. 오히려 남자 주인공 강석현보다는 그의 친구로 나오는 이경영의 존재감이 더 빛났고(아마 이 영화로 신인상인가 조연상인가를 받은 것으로 기억난다), 하지만 재미는 좀... 그랬다. 그렇지. 한국영화는 어쩔 수 없어. 그 오만은 그로부터 2~3년 뒤 깨지고 만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비디오천국에서 빌려본 영화가 뭐였지? 그게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 참 유감이다. <첩혈쌍웅>은 역시 형 친구를 통해서 봤고 <영웅본색> 시리즈는 다른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본 것 같다. 아무튼 이제부터 쓸 '비디오천국의 기억'은 연도를 떠나 기억나는 영화와 가게의 추억 위주로 쓸 예정이다. 부족한 글이지만 같이 추억을 나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일단 여기까지. 프롤로그는 너무 길면 재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