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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면을좋아하는타입 Nov 08. 2018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첫 직장에 다닐 때, 우리 팀장님은 가끔씩 아무 날도 아닌데 팀원들에게 꽃을 사다주고는 했다. 그 전까지 꽃이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막상 싱싱한 꽃다발을 받으니까 기분이 좋았다. ‘이건 프리지아고, 이건 수국이고.’ 선물 받으면서 꽃 이름도 설명해주셨다. 꽃 선물을 이렇게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게 할 수도 있구나. 꽃 선물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느끼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이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작년에 우연히 꽃을 정기배송 해주는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내가 직접 꽃을 사러 시간과 돈을 들여서 나가지는 않지만, 누군가 정기적으로 준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것도 합리적인 가격에. 하나 신청해볼까 하고 구경을 하다가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꽃 선물이 기분 좋다는 걸 안 이후로 친구들에게 가끔 꽃 선물을 해주긴 했어도 어버이날을 제외하고 엄마에게 꽃 선물을 한 적은 없었다. 엄마가 좋아할까? 아니면 쓰레기가 는다고 귀찮아 할까? 반신반의 하면서 2주 마다 정기적으로 꽃을 배송해주는 서비스를 결제했다. 조그만 카드에 메시지도 입력하고, 꽃을 꽂아둘 갬성 넘치는 유리병도 함께 주문했다.


엄마에겐 첫 배달을 서프라이즈로 하기로 했다. 꽃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해서 혼났지만, 잠깐 딴 짓을 하다보니 시간이 훅 지나갔다. 평소 엄마가 소녀갬성에 마음이 여린 타입이기 때문에 일단은 그래도 좋아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그런데 엄마는 내 예상치를 넘어서서 너무 기뻐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전화가 왔다. 몇 주 동안이나 꽃 사진을 카톡 프사에 걸어두고, 가족방에도 자랑을 했다. 친구들 밴드에도 엄청나게 자랑을 한 모양이다. 괜히 마음이 짠 했다. 겨우 만원 조금 넘는 금액의 선물인데. 엄마가 질린다고 말할 때 까지 계속해서 꽃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꽃을 2주에 한 번 보낸지 1년이 되어가는데 엄마는 아직도 질린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2주에 한 번씩 꼬박꼬박 꽃 사진과 감상평을 보낸다. ‘이번 꽃은 어떻고~ 저번 꽃은 어떻고~’ 가끔 클레임도 건다. ‘꽃이 시들어서 도착했으니까 인터넷에 글 좀 남겨봐.’


오늘 도착한 따끈따끈한 감상평


그런 엄마를 보고 할머니가 전화가 왔다. “니 엄마한테 꽃 보냈더라? 너거 엄마한테 보낼 거 있으면 내한테나 보내라.” 분명 할머니는 어버이날에 꽃 바구니 보내고 퉁칠 생각 하지 말라고 그랬었는데 꽃을 좋아하다니! 하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뜨끔했다. 할머니가 꽃을 좋아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한테만 꽃을 보낸 거였다. 곰곰히 생각해봤다. 왜 우리는 지레짐작으로 어른들의 취향을 우리와 다를 거라고 생각하고 늙은이 취급을 했던 걸까. 혹시 어른들도 우리처럼 힙하고 예쁜 게 좋고, 노는 게 좋지 않을까?


엄마와 할머니가 더 나이가 들어서 활동에 제약이 생기기 전에 많이 ‘어울려 놀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어른들 취향 맞춘답시고 ‘옛것’들을 찾아다니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같이 하기로 했다. 그래서 올해까지 완성하기로 마음먹고 버킷 리스트를 만들었다.


3대가 함께 해야 할 버킷 리스트

유행하는 인생네컷 사진기에서 사진 찍기 (완료)

뷰 좋은 호텔에 호캉스 가서 수영하기 (완료)

VR 게임방 가서 VR 게임 체험하기 (완료)

보드게임하기 (완료)

‘5년 후 나에게’ 다이어리 쓰고 5년 후에 서로 돌려보기 (작성 중)

호텔 이그제큐티브 라운지 체험하기

셋이 옷 맞춰 입고 힙하게 프로필 사진 찍기

힙한 카페가서 인생샷 찍기

같이 닌텐도로 동물의 숲 게임하기

분위기 좋고 힙한 술집가서 술 마시기



몇 개는 완료 했고, 생각보다 더 좋아하셨다. 예를 들면, 인생네컷 사진을 찍어 나누어 갖고는 이쁘게 나왔다며 좋아하셨고, 호캉스 가자고 했을 때는 비싼 돈 주고 거길 왜 가냐, 가서 수영은 또 뭐하러 하냐 불평 하시더니 막상 도착해서는 수영장에서 사케와 치즈까지 시켜먹으면서 좋아하셨다. 레이싱 게임도 정말 즐기면서 하셨다. 보드 게임도 별로 안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아주 열정을 불태우셨다.


엄마와 할머니가 새로운 것을 경험해보시고 만족하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 취향이 변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취향이 예전 그대로 멈춰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가 좀 더 알려드리면 된다. 더 많은 것들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 내일도 열심히 돈을 모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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