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문화정책
‘방황하는 네델안드인’은 1843년 1월 2일 드레스덴 왕립극장에서 초연한 바그너의 오페라 작품이다. 이 오페라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노르웨이 배의 선장 달란트는 심한 폭풍우에 휘말리게 되고, 표류를 한 끝에 노르웨이 어느 해안에 닿게 된다. 얼마 후 저주받은 네덜란드인 선장 배도 달란트 선장이 도착한 해안가 강어귀로 들어와 닻을 내린다.
네덜란드인 선장은 달란트에게 7년마다 한 번씩만 상륙할 수 있도록 저주받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죽음을 맹세하는 진실한 사랑을 만나면 구원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 후 네덜란드인 선장은 노르웨이인 선장 달란트의 딸 젠타와 사랑을 나누게 되지만 네덜란드인 선장은 그녀의 사랑을 의심하고 출항하고 만다. 하지만 그녀는 네덜란드인 선장에 대한 정절을 노래하며 바다에 몸을 던진다.
젠타의 사랑이 영원히 바다에서 방황해야 하는 네덜란드인 선장의 저주를 극복하고, 참혹한 운명으로부터 그를 구해낸 것이다. 젠타의 영혼과 네덜란드인 선장의 영혼은 어느새 붉은 노을이 지는 하늘로 승천하고 오페라는 막을 내린다.
다소 장황하게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소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오늘날 네덜란드인들이 발전을 위한 문화정책의 묘책을 찾는 일이 어쩌면 이 작품 속 젠타의 사랑이 저주받은 네덜란드인 선장을 구원해 주었듯 오늘날에도 네덜란드의 문화정책이 저주받은 네덜란드인에게 젠타가 보여준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제시한 것과 똑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이다. 특히 네덜란드인의 문화정책은 바로 젠타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선장을 위해 부르는 사랑의 찬가처럼 들리니 말이다.
1. 바른 이해를 위한 문화정책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는 국립 암스테르담 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일명 렘브란트 박물관이라고도 부르는데 렘브란트의 작품들 뿐 아니라 네덜란드의 유명 작가들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은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세계적인 화가들이 태어났고 작품 활동을 한 곳이기에 암스테르담박물관뿐 아니라 곳곳에 유명 작가들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런데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이해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고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면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에 전시 중인 네덜란드 초기 화가 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프리카인의 초상>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얼마 전까지 <무어인의 초상>이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여러 관련 책들에는 여전히 <무어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오래전 유럽을 침공했던 이슬람교도인 무슬림들이 강인한 무어인이었기에 작품 속 검은 얼굴의 주인공을 무의식적으로 무어인이라고 부른다면 말이 되느냐고, 검은 피부라면 정확히 아프리카인임을 밝혀주는 게 맞다는 취지이다. 그래서 레이크스 박물관 측은 이제는 <아프리카인의 초상>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원래 무어/Moor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검다’는 의미인데 유럽을 침공한 검은 전사들을 아랍 출신이든 아프리카 출신이든 구분 없이 흔히 무어인이라 불렀다.)
이런 식의 표현은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21세기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적지 않게 발생하고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무어인의 초상’이라는 말과 ‘아프리카인의 초상’이라는 단어로 검색하면 작품 속 검은 피부의 사람들은 모두 무어인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단순 무지함의 인식 행태는 문화예술계의 적지 않은 부분들, 심지어 문학작품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소위 복고풍(소위 레트로인지 뭔지)이라면서 온통 일본식 냄새를 풍기려 하는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만 하다. 문화가 한국 문화로서의 가치보다 싸구려 왜색 상품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 문화의 전도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심지어 문학작품이나 화가들의 작품들 상당수가 일본식으로 번역되는 것은 물론, 심지어 그대로 일본식 표기를 사용하고 있음은 일제 치하로 회귀하자는 건지 도대체 알 수 없을뿐더러 내심 불쾌하기까지 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런 일이 다른 곳도 아닌 유명 출판사와 언론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한심하고 창피한 일이 아닌가 말이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식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문화적 사실들을 왜곡 변형시키고 있는 표현들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니그로, 에스키모 등등 모두 혐오스러운 표기이고 비인간적 표현인데도 여전히 초등학교에서 까지 그대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 말의 뜻을 몰라서 그러는 건지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모두 지난 시절 잘못 사용된 용어들이려니 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잘못된 용어들이 많다. 그러니 저주받은 네덜란드인들 처럼 우리의 문화도 방황하고 저주받은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러니 더욱 바른 이해를 위한 문화정책이 필요하지 않은가.
2. 자유로운 문화와 문화의 자유로움
네덜란드의 사회발전과정을 보면 16세기를 전후해 개신교도가 가톨릭을 배척하고 성상파괴 운동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개신교 활동이 사회의 중심 기류로 번지기도 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레이크스 박물관)을 처음 지으려고 했던 1884년 당시에 가톨릭 양식으로 작성된 건축물 도안을 놓고 개신교 측에서 많은 저항과 비판이 따랐다고 한다.
둥근 천정과 화려한 장식을 한 벽면의 긴 통로 등등 모두 전형적인 가톨릭 건축양식이라는 이유로 적지 않은 곤혹을 치루어야 했기에 실내 벽면을 온통 백색으로 칠하거나 벽면에 장식한 부조물들을 모두 제거하고 아무 장식 없는 통로를 만들어 개방감을 중시하려 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색상이나 장식 등에 대한 이해도 작품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려 했기 때문에 외형은 아름다운 가톨릭 특유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지니면서 내부는 장식을 중시하는 가톨릭 양식이 아닌 담백하고 단순한 형태의 전시장으로 꾸며진 국립박물관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와 더불어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이 최근에 보여주고 있는 전시행정의 백미는 소위 비대면 시대에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전시행정인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동안 텔레비전의 발전은 그야말로 영상시대의 총아로 엄청난 발전을 거듭해 왔다. 특히 평면 텔레비전의 발전으로 가히 집안을 온통 대형 화면을 지닌 극장이나 대규모 박물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더 이상 박물관이나 극장에 가지 않고도 집안에서 모든 것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원본 그림을 보러 박물관을 찾는 횟수가 더 늘어나고 있는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된다. 원본 그림을 보려고, 아니 원본 그림이 보고 싶다는 욕망은 과연 디지털 신호로 보여주는 그림이나 작품들이 진실된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원본, 즉 아날로그 작품의 체취를 확인하려는 욕망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틈엔가 부자들은 원본 그림을 여전히 더 극성스럽게 고가로 매입하고 경매시장에 나오는 유명 작가의 작품들은 물론 멋있어 보이는 작품들 모두를 매입하고 있는 현상이 늘어만 간다. 이런 상황에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이 취한 행동은 어쩌면 어이없는 행동이라고 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름 아닌 모든 원본 그림을 디지털화해서 무료로 사용을 할 수 있도록 공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는 모든 저작권을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저작권을 주장하려 하지 않고 원본을 공개해 재사용하거나 재활용해도 좋다고 공개 선언을 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건 저작권과 저작인접권을 모두 포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과 다름 아니다.
현재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작품들을 계속 디지털화 해서 순차적으로 공개를 하려 한다. 공개된 작품들은 누구나 조건 없이 내려받기가 가능하며, 이 작품들을 가지고 부분 부분 조각을 내서 자신만의 다른 자품으로 재활용하거나 덧칠을 하는 등 재활용을 통해 다른 작품으로 만들 수 있도록 모든 형태의 작품 활용을 허용하고 있다.
신진작가들이 마음 놓고 자신만의 창조력을 발휘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기꺼이 하겠다는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아니 네덜란드인들의 바이킹다운 면모를 보면서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에라스무스와 자유를 노래한 스피노자의 정신이 오늘날 네덜란드의 중심가치를 이루고 있음을 또다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어 은근히 부럽고 고맙다는 생각에 우리 문화계의 구태의연한 현실이 주는 중압감과 비교되면서 그만 숨이 막혀옴을 느끼게 된다.
*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Rijksmuseum)의 인터넷 누리집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