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축제의 막이 오르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 이곳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9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빌라 르 빌(Villers-la-Ville)' 수도원이 있다. 지금은 폐허로 변했지만 그 규모가 엄청나다. 빌라 라 빌은 1146년 클레어보(Clairvaux)에서 이곳 빌러스(Villers)로 12명의 승려와 수도원장, 그리고 5명의 평신도가 파견되어 새로운 수도원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이 수도원은 산속 계곡에 있어 사회와 완전 격리되어 자급자족을 모토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이곳을 황폐화, 아니 초토화함으로써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숨은 공간 기능을 상실하고 대신 인간사회의 쉼터로 재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현재 빌라 르 빌 수도원은 1987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여름축제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그 중심에 1987년 설립된 쇼 제작 회사 델 디퓨전(DEL Diffusion)이 있다. 이 회사는 설립되던 해 첫 번째 공연으로 바라바(BARABBAS)를 시작으로 쥴리엣과 로미오, 노트르담 드 파리 등 작품을 갖고 매년 여름 이곳 수도원으로 7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다. 이곳에서 해마다 특정의 인간을 통해 또 다른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느끼게 해 준다.
2018년 여름 축제의 주인공은 로마제국의 젊은 황제 칼리굴라, 그가 겪었을 청년기의 좌절과 방황이 한여름밤을 쉼 없이 서늘한 공포와 연민으로 물들인다. 그건 그가 지독히 사랑한 여인이자 친누이인 드루실라(Drusilla)의 죽음과 맞닿아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칼리굴라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은, 누구나 죽지만 아직 죽음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이른 나이의 이별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더구나 이로 인한 심리적 갈등과 비이성적 행위 역시 특이한 인간 유형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당연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러나 누구도 타인의 비이성적 행위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비이성적 행위를 이해해 주길 바랄 뿐이다. 마치 칼리굴라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행위 양식일 것이라 생각된다.
칼리굴라 연극의 원작은 알베르 까뮈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까뮈는 칼리굴라를 황제이기 이전에 한 젊은이가 겪고 있는 비이성적 행동으로 인한 냉소주의와 비관적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칼리굴라가 겪었을 절망과 좌절은 과연 비이성적인 행위로만 치부될 것인지, 그가 속한 사회의 부조리가 부추긴 것은 아닌지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에 숨어있는 동물성, 혹은 야수성이 어떻게 비정상적인 인간을 만드는지를 유심히 볼 일이다. 특히 동물성은 인간의 이성을 파괴하고 어둠을 초래하기 때문에 어둠을 초래해 불안감을 조성하고 헛된 자만심으로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 광기의 본모습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2. 그들이 두려워하는 한
‘광기의 역사’를 쓴 미셀 푸코, 그가 스웨덴 웁살라 대학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을 때 논문을 심사한 교수들이 “논문이라기보다는 현란한 문학에 가깝다.”는 이유로 학위 수여를 거부한다. 푸코는 “정신분석은 상상력의 맥락을 알아야 한다.”라고 강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논문을 제출해 우여곡절 끝에 통과된다.
푸코가 말하는 광기의 역사는 17세기 이성(raison)이 비이성/ 광기(draison)를 배제, 감금하고 침묵시킨 일련의 과정에 대한 서술이다.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비이성의 구분과 그에 따른 일방의 억압과 배제, 그리고 그 뒤에 숨어있는 권력의 음침한 시선이 이 시대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 유효하다는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재도 광기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광기의 역사가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는 것은 미셀 푸코의 분석을 보지 않더라도 현 한국 정치시스템을 보게 되면 쉽사리 알 수 있다. 그 예로, 3권 분립을 표방한 헌법조차 무시하면서 한 사람의 억압과 배제로 진행되는 권력 놀음, 더욱이 그 뒤에 자리한 또 다른 권력의 음산한 시선이 여전히 이 시대 광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현 한국사회의 가장 큰 특징을 광기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할 수 있겠다.
지난 광기의 시대에는 나름의 광기 어린 주인공이 있을 터, 역사 속 가장 미친 인물들이 여럿 있을 테지만 작금의 광기를 주도하는 인물을 쏙 빼어닮은 칼리굴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칼리굴라를 떠올리는 이유는 다름 아닌 바로 그가 하던 말 때문이다.
“oderint dum metuant”(나를 증오하더라도 나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한, 증오하게 놔두어라! 그들이 나를 미워해도 좋아. 그러나 그들은 내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나를 두려워할 것이다.” 어쩌면 그리도 오늘 우리 사회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내뱉은, “나를 탄핵하고 싶으면 하라고 하지...”라는 말과 그리도 같은지 신기할 정도이다.
“Oderint dum metuant”는 로마 황제 칼리굴라(Caligula)가 자신의 좌우명으로 사용한 라틴어 문구이다. 이 말은 로마의 시인이자 희곡작가인 악시오(Accio, BC 170-BC 84)의 단편 희극 아트리우스(Atreus)에 나오는 대사인데, "그들이 두려워하는 한"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한” 절대자는 자만심으로 충만해지게 된다. 그러나 자만심은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더욱 발전하면서 광기를 부리기 시작한다. 광기는 결국 대중이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은밀하게 절대자를 부추기면서 자란다.
칼리굴라(Caligula: Gaius Jul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AC 12년 8월 31일 - 41년 1월 24일), 그는 로마 제국의 3대 황제(재위 AC 37년 3월 16일-41년 1월 24일)이다.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 칼리굴라는 자기 아버지가 지휘하던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귀엽다고 붙여준 '꼬마 장화'라는 뜻을 가진 애칭이다.
그런 그가 로마 역사 최악의 폭군으로서 영화, 오페라, 드라마 등에 자주 등장한다. 집권 3년 10개월 만에 비극적 종말을 맞는 칼리굴라. 과연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아그리피나(언니)의 아들로 태어난다. 네로의 어머니인 같은 이름의 아그리피나는 그의 여동생이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방면군의 사령관직을 맡고 있어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을 로마 제국의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보내게 된다. 이때 아버지 휘하의 병사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꼬마 장화'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군단의 마스코트가 된다.
그런데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 남긴 유서에 의해 칼리굴라는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메루스와 함께 로마 황제의 공동 후계자로 지명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가 77살에 죽자 칼리굴라는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단독 황제로 등극한다. 이때가 그의 나이 24세. 티베리우스가 죽기 전 공포 정치를 펴 인기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공동상속인으로 지명한 게메루스 티베리우스를 무시하고 칼리굴라를 단독상속인으로서 황제에 취임토록 한 것이다.
이에 부응하듯 칼리굴라는 황제 취임 직후 티베리우스의 재정 낭비 정책을 중지시키고 로마시민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면서 시민들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시행한다. 그러나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갑자기 고열로 쓰러져 3개월에 걸친 혼수상태를 겪으며 심하게 열병을 앓는다. 그 후 칼리굴라는 그 후유증으로 정신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지 못하고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폭군으로 돌변한다.
칼리굴라는 자신이 병치례를 한 것은 누군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주변 인물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공동 상속자이자 잠재적 라이벌인 게메루스에게 자살을 강요해 죽게 하고, 자신을 불신하던 상원의원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심지어 상원의원의 아내를 강간하기까지 하면서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칼리굴라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로마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하면서, 희생자들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보고 열광한다. 심지어 사형집행인에게 “그가 죽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하라”라고 부르짖기까지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칼리굴라는 검투사 시합을 과격하고 참혹한 내용으로 바꾸고 화려한 만찬을 즐기고 도박을 일삼으며, 국고를 탕진해 재정을 파탄 나게 한다. 자신의 사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칼리굴라는 결국 세금을 인상하거나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고 자신이 살해한 시민의 재산을 몰수하기까지 한다. 결국 민심은 급속히 이탈하게 된다.
한편,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공공연하게 겁탈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타던 말을 원로원의 대표 격인 집정관으로 임명하는 일도 발생하는데, 이 일은 결국 원로원을 아예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라고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칼리굴라와 원로원과의 관계는 극한적인 갈등상황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처럼 자신을 암살할지 모른다는 피해망상증은 칼리굴라를 더욱 ‘미친 정치’에 빠져들게 한다.
그의 ‘미친 정치’가 보여준 가장 최악은 근친상간이다. 단순히 성적 충족감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혈통뿐이라는 피해망상증이 낳은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세명의 여동생과 근친상간을 하게 되고 자신의 후계자를 만들려고 노력을 한다. 드디어 첫 번째 여동생이 임신을 하지만 아이를 낳다 죽고 만다. 그러자 이번에는 죽은 여동생을 신격화하면서 로마 곳곳에 여동생을 기리는 신전을 세운다.
칼리굴라는 이처럼 비정상적인 통치를 하면서 누이들과 근친상간을 하고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신처럼 복장을 하는 등 기행을 일삼는데, 이러한 기행은 여러 번 영화화되기도 한다.
처음 칼리굴라를 다룬 영화가 1979년에 만들어지는데 미국 보스턴 시에서는 지나치게 잔인하고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상영을 금지한다. 상영 금지 소식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발동하게 만든다. 결국 사람들은 다른 도시까지 가서 영화를 보려 한다. '금지된 것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 때문인데, 이때부터 ‘칼리굴라 효과’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한다.
한편, 원로원과 대립하던 칼리굴라는 국민적 지지기반을 넓히고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갑자기 해외원정에 나서기도 한다. 영국을 침략하려 한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정치가든지 대중의 인기와 지지를 높이기 위해 가장 많이 써먹는 수법이 바로 내부의 갈등을 외부의 갈등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전쟁을 하면서 그들이 이루어 내는, 혹은 이루어 낼 가능성 있는 그 무엇이 그를 마치 위대한 전략가인양 칭송을 해주리라 생각하지만 실제 결과는 아무런 소득 없이 비용과 시간만을 낭비하게 되면서 실패하고 만다. 그 이유는 칼리굴라의 원정이란 게 처음부터 의도적인 갈등회피용으로서 명분도 실리도 얻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결국 과대망상증은 폭군의 피해망상증과 어울리면서 칼리굴라 자신은 물론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로마제국 모두를 멸망과 파멸의 길로 이끌게 된다. 그러던 중 서기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는 팔라티노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공연장으로 간다.
그는 공연을 관람한 뒤 점심을 먹으러 궁전으로 돌아가던 중 평소에 칼리굴라가 가장 신임하던 근위대장 카이레아(Cassius Chaerea)를 비롯한 여러 다른 부대 장교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그의 통치기간은 3년 10개월이었다.
3. 광기의 역사는 반복된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은 뒤 칼리굴라가 물려받은 제국은 광대한 로마 제국이었다. 모든 땅과 바다가 로마 제국의 이름 아래 조화로운 통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유프라테스 강에서 라인강까지 끌어안은 로마제국은 태양이 뜨고 지는 것까지도 끌어안고 사는 듯했다.
이런 모든 특전은 본국 이탈리아에 사는 로마 시민들만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럽인과 아시아인을 포함한 제국의 모든 백성들이 누리고 있는 특전이었다. 이런 상태의 제국을 물려받는 행운을 얻은 황제는 칼리굴라가 처음이었다. 권력적인 측면에서든 금전적인 면에서든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그처럼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행복을 받아들이기에는 칼리굴라의 지나친 광기가 오히려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칼리굴라의 기행과 참살되는 장면이 머릿속에 혼탁하게 그려지면서 문득 지난 시기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기행과 몰락이 그대로 연상이 되면서 광기의 흐름이 또다시 반복되어 나타나는 그림들을 만나게 된다.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절대 가져서는 안 되는 이들 전현직 대통령들의 공통점은 무고한 국민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자신만을 위한 부를 축적하기 위해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남용하고, 온 국민을 불신에 빠지게 하고 비민주적 행위를 일상화한다.
그 예로, 최근에 한국의 법원이 한국법이 아니라 일본 법을 근거로 일제강점기에 도둑질해 간 불상을 한국으로 훔쳐(?) 온 것을 “일본이 소유한 기간이 일본법이 정한 기간을 충족시켰다”라고 일본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미친 판결을 내린다.
그뿐 아니다. 대통령이라는 자가 국민을 대신해 국회에서 의결한 법안들을 거의 대부분 거부권이라는 이름으로 저지해 국민들 의견은 거의 반영될 기회를 상실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일부 국민들은 점차 미친 권력자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느끼게 되고 현실정치를 외면하게 된다. 그럴수록 미친 권력자는 더욱 광기에 젖어들게 되지만 결국은 파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마치 칼리굴라가 자신의 아내와 누이를 신격화하고 자신마저 스스로 신인양 거들먹거리며 주변 사람들을 권력이라는 방패막이를 두르고 “oderint dum metuant”(나를 증오하더라도 나를 두려워할 것이다)를 외쳐댔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두려워하는 한” 광기의 역사가 반복되고 영원할 것이라는 사이코패스를 쏙 빼닮은 자들의 기대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