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제리의 대장식화
“작가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아뜰리에를 가지고 싶어 한다.
모네의 아뜰리에는 바로 물과 빛이 춤추는 자연이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그에게는 흔히 ‘물의 화가’라는 애칭이 따른다. 그에게 그런 애칭이 붙게 된 건 모네가 언제나 물과 빛의 관계를 중요한 작품 주제로 삼아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모네는 그런 그의 작품활동을 위해 지베르니에 정원을 조성하고 그곳에 물의 화가답게 작은 호수까지 꾸며놓는다. 모네는 사시사철 물에 비치는 빛이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향연을 화판에 담는다. 지베르니 정원은 모네가 가장 바라던 자연을 옮겨놓은 아뜰리에였다.
물의 화가 클로드 모네, 그의 삶은 이제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시작하고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끝을 맺는 듯했다. 하지만 실제 그의 삶은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시작해 오랑제리의 전시실에서 끝이 났다. 담장 너머에서는 전쟁의 포화가 울려댔지만 모네는 보이지 않는 눈을 비벼가면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오랑제리의 대장식화를 그려나갔다. 오랑제리의 대장식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클로드 모네, 그는 1840년 파리에서 출생한다. 그리고 모네가 4살이 되자 노르망디에 있는 작은 마을 르아브루(Le Havre)로 이사를 한다. 모네는 소년 시절을 영국해협에 인접한 도시 르아브르에서 보낸다. 이때 그는 멀거니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는 했다.
모네는 자라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모네가 어린 시절 익숙하게 접했던 바다는 어느새 그의 작품 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모네는 어느새 그가 어려서 보았던 바다를 떠올리며 물을 그리고 있었다. 물과 빛을 담아내려는 모네의 노력은 결국 수련을 화폭에 그려 넣기에 이른다.
물의 화가 모네, 그가 그리는 수련 그림들은 과연 어떻게 시작되었던 걸까? 모네가 마지막 정착지로 정한 삶의 터 지베르니를 휘감아도는 센강을 따라가다 보면 모네가 지나온 길을 따라가게 된다.
모네는 19세가 되는 1859년 파리로 간다. 이때 모네는 인상파를 알게 된다. 그래서 모네의 유년시절 그가 보았던 따스하고 화사한 햇살과 물에 비친 햇살을 그리기 위해 센강 주변으로 이사를 한다. 모네가 센강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모네 작품의 핵심이 언제나 물과 빛이기 때문이었다.
모네는 사람이 언제나 자연의 일부가 되어야 자연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모네는 한때 보트에 그의 작업실을 만들어 그 배를 타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직접 물 위에서 작업을 한 것이다. 센강에 배를 띄우고 작업을 하면 훨씬 물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연과 하나가 된 모네는 이제 자신의 내면 세계를 거의 물의 세계와 일치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모네가 20세가 되자 군대에 징집된다. 그러나 모네는 알제리에서 복무하다 장티푸스에 걸려 1년 만에 전역을 한다. 그 후 파리에 정착한 모네는 르누아르와 알프레드 시슬레 등과 어울리며 우정을 나눈다. 이들은 그 후 새로운 미술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1867년 모네는 그의 모델이자 뮤즈인 카미유가 첫아들 장을 낳는다. 1869년에는 르누아르와 함께 파리에서 가까운 센 강변의 라 그루니에에서 함께 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전쟁을 하자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를 한다. 이곳에서 영국 화가들 작품을 접하면서 밝은 색조 표현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는다.
1871년 영국에서 파리로 돌아온 모네는 자신만의 공간과 자신만의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또다시 이사를 한다.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집을 마련하고 작품활동을 한다. 한편 1873년에는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으로 이루어진 무명 예술가 협회를 조직하는데 이 협회가 훗날 인상주의의 모태가 된다.
1874년이 되자 드디어 모네를 중심으로 인상파 그룹전이 개최된다. 이때 모네는 참가 작품으로 물의 화가 답게 센강에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노를 젓고 있는 어부들의 모습을 그린 <인상, 해돋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출품한다. 이후 해마다 모네는 그룹전을 열고 작품을 출품하면서 인상파 그룹의 리더 역할을 하게 된다.
인상파 화가라는 이름으로 모네의 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1876년 미술품 수집가인 에르네스트 오데세와 그의 아내 앨리스가 모네에게 작품을 의뢰하면서 가깝게 지내게 된다. 그러나 2년 뒤 후원자인 오데세가 경기불황으로 파산하고 벨기에로 잠적해 버리자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앨리스는 여섯 자녀를 데리고 모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모네의 아내 카미유가 둘째를 출산하다 안탑깝게 1877년 32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다. 이후 모네는 앨리스와 연인처럼 지낸다.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더욱 자신만의 작품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모네는 지금까지 살던 곳을 벗어나 보다 자연적인 아뜰리에를 원한다. 이를 위해 모네는 드디어 지베르니에 그가 필요한 공간을 마련하고 정원을 꾸민다. 그리고 이곳으로 이주를 한다. 이제부터 모네의 아뜰리에이자 삶의 공간은 바로 지베르니가 된다.
그러나 지베르니에 정원을 꾸미고 이주하기까지 그리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지베르니의 정원을 꾸미는 초기 과정에서 주민들은 엄청난 반대를 했다. 모네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연못은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오염 문제 등 복잡한 문제들이 산적했는데 다행히 주민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 모네가 그리던 연못을 완성하게 된다.
1883년 모네는 드디어 노르망디의 지베르니로 이사를 하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모네는 이제 그가 필요로 하는 물을 곁에 두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센강에서 가까운 지베르니에 정원을 꾸미고 수련이 가득 피어있는 연못까지 만들어 물과 빛을 그의 정원에서 모두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베르니는 모네에게 행복의 정원이다. 빛의 집합체로서 정원에 꽃을 심고 연못을 만들어 그가 바라던 물의 정원을 완성한 것이다. 지베르니 정원의 연못은 10년 이상 공들인 결과물이기도 했다. 모네가 지베르니의 정원에 꽃을 가꾸는 방식도 빛에 따라 달랐다. 아침햇살이 비출 때는 차가운 색상의 꽃을 심어 빛을 받게 하고, 저녁햇살이 비출 때는 따스한 꽃을 심어 빛을 받게 한다. 빛의 자연스러운 변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드러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모네가 그리고 싶은 자연을, 물과 빛을 직접 만들어 그림으로 담아낸다.
지베르니에 정착한 후 모네의 특징을 드러내고 모네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탄생한다. 모네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고 있는 하나의 주제를 여러 개의 작품으로 표현하는 시리즈물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를 대표하는 수련 연작이 바로 그것이다. 모네의 수련 작품은 250여 점이 있는데 전 세계 이름 있는 미술관에는 대부분 모네의 수련작품이 걸려 있을 정도이다.
물과 빛을 조화시키는 꽃 수련, 바로 수련은 모네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뮤즈이기도 하다. 지베르니에 정착하면서 모네는 그가 그리고 싶었던 물과 빛의 조화의 결정체 수련을 그린 작품 48점을 그린다. 이 작품들을 가지고 1908년 모네는 전시회를 연다. 그의 나이 70대에 성공적인 전시회를 한 것이다.
한편, 모네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시력이 약해져 갔다. 그러나 모네의 시력 감퇴는 또 다른 관점을 창조하게 된다. 더구나 프랑스가 프로이센과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전쟁에 대한 혐오감이 증대하게 되자 모네는 점차 비폭력 행사의 일환으로 그림을 그려나간다.
이제 세상은 새로운 비전이 필요했다.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이 또다시 전쟁에 휩쓸리기 시작하자 당시 모네의 친구이자 프랑스의 전쟁 영웅 클레망소는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클레망소는 모네의 작품이 평화의 상징으로서 그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면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모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클레망소는 이후 모네에게 작가로서의 명성과 작품의 창의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와중에 모네와 동거하던 앨리스 마저 백혈병으로 사망을 하고 모네의 장남 장까지 죽음을 맞는다. 이때부터 모네의 시력은 더욱 나빠지게 된다. 모네의 시력은 백내장이 악화되어 이제는 연못조차 제대로 보지를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드디어 모네가 그림을 더 이상 그리기 힘들게 되어 은퇴한다는 소식까지 들리게 된다.
이런 소식을 듣게 된 그의 친구 클레망소는 지베르니로 직접 모네를 찾아온다. 전쟁이 끝나자 클레망소는 프랑스 최고 권력자인 총리에 취임한다. 그리고는 더 이상 붓을 잡지 않으려 한 모네를 다시 이젤 앞으로 보내려고 클레망소는 모네를 격려하고 멋진 제안과 함께 특별한 선물을 한다. 모네의 작품만을 영원히 전시할 수 있는 모네만의 전용 특별전시공간을 오랑제리에 확보해 준다, 그리고는 모네가 오랑제리에 대장식화를 그려주기를 청한다. 이제 오랑제리에 모네의 수련화가 영원히 시들지 않고 피어나게 된 것이다.
모네는 클레망소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다시 붓을 잡는다. 모네가 대장식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모네는 엄청난, 아니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고 있었다. 반면 클레망소는 전쟁에 몰두해 있었다. 결국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도 전쟁에 동원되어야 했다. 지베르니에 임시 야전병원이 세워졌다. 이곳에서 전쟁에서 다친 병사들을 치료해야 했는데, 모네는 지베르니 정원에서 대장식화를 그리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면서 다친 병사들 아우성 소리를 들으며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이런 작업환경이었지만 모네는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려나간다. 거대한 대장식화가 서서히 완성되어 갔다.
그 사이 모네의 아들 미셀도 전쟁에 참전해 전사하고 만다. 그러나 모네는 슬픔을 억누르며 붓을 놓지 않고 운명을 받아들인다. 모네는 그림을 그리며 세상을 새롭게 보려고 했다. 시력이 악화되었지만 이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새롭게 보는 계기로 삼는다. 모양과 색상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세상은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는 생각에 관점을 새로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파리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오랑제리 전시실은 빛이 잘 들어오도록 설계를 했다. 동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해를 따라 창문을 통해 오전부터 오후 해지기 전까지 빛에 따라 그림에 비치는 빛의 작용이 재미있게 진행된다. 햇빛에 따라 수련이 피고 지는 느낌을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했다. 마치 지베르니에서 모네가 빛의 흐름을 살려 정원을 꾸몄듯이 그렇게 랬다. 물론 날이 흐린 날에는 아쉽기 그지없을 테지만 말이다.
오랑제리 전시실에 담길 모네의 초대형 수련화 그림들을 그릴 즈음 모네의 시력은 상당히 저하되어 있었는데, 거의 그의 눈은 잘 안 보일 정도로 시력이 약화되고 있었다. 모네가 말년에 그린 수련들, 특히 오랑제리에 걸릴 수련화를 그릴 즈음 모네는 상대적으로 선명한 색 보다 뭉그러진 탁한 느낌의 색을 사용한 작품을 그리고 있었다.
오랑제리에 모네가 그린 대장식화의 수련들은 예전 모네가 그린 수련화들과는 많이 차이가 나는 느낌을 준다. 예전의 수련화가 이른 아침 햇살을 받아 선명하고 청초한 느낌이라면 말년에 그린, 오랑제리를 가득 채운 수련화들은 저녁노을에 물들어 선명하기보다 그림자에 묻힌듯한 색채로 어둑어둑한 느낌마저 들고 있다.
늙으면 시력감퇴로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의 경계를 구분 짓지 못하고 중간색을 더 많이 택하게 되는 것인지 모네의 수련은 어쩌면 모네를 따라 색이 바래지면서 시들어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대장식화에 그려진 수양버들, 어쩌면 바로 이 수양버들은 모네의 자화상이자 초상화라고 해도 무방할지 모른다. 지베르니 연못에 우뚝 솟은 나무, 그건 바로 모네 자신이란 말이다. 이와 함께 핏빛의 모네 정원은 병사들의 피, 그래서 비폭력 저항행위로서의 모네 정원은 편안하게 따스함으로 가득해진다.
대장식화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인 1926년 클레망소는 다시 한번 모네가 있는 지베르니로 마지막 방문을 한다. 그 후 모네는 숨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나서 오랑제리가 문을 열게 되어 모네의 대장식화가 공개된다. 그러나 안탑깝게도 모네는 자신의 대장식화가 걸린 오랑제리의 개관식은 보지를 못하고 눈을 감는다.